여행기, 산행기

힘들어도 다시 한번 - 북한산 12성문을 돌다 (5)

솔뫼들 2017. 10. 30.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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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마지막 원효봉만 오르면 힘든 코스는 끝난다고 일행을 격려하면서 걷는다.

10월이라 그런지 오후 4시를 넘기자 해가 설핏해지는 느낌이다.

초반에 워낙 잘 걸어서 7시간만에 오늘 코스를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잠깐 했었지.

후반부에 체력이 떨어져 속도가 느려지는 걸 감안해도 해가 지기 전에 하산을 할 수는 있으리라.


 금방 원효봉에 도착했다.

우리가 시작할 때 조망했던 봉우리에 선 것이다.

원효봉에서는 반대로 우리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상능선의 삐죽삐쭉한 봉우리들을 모두 거쳐 여기까지 온 셈이다.

일행 모두 감개무량한 듯 스마트폰을 들이대며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마지막 간식까지 챙겨 먹고도  몇몇 배낭에는 남은 음식이 있단다.

정말 많이 준비했군.

각자 편안한 자세로 자리잡고 쉰다.

이제 그래도 되겠지.


 남은 시구문을 향해 몸을 일으킨다.

쉬운 코스라고 마음을 놓았는데 여기에도 암릉이 남아 있었군.

하기는 내 기억에 북한산에서 릿지코스로 '원효, 염초 코스'가 가장 난이도가 높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숨은벽 코스를 손에 꼽고 나는 숨은벽 코스에서 추락을 한 적도 있지만 염초봉을 오를 때가 제일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했었지.

지금은 암벽장비가 없으면 출입을 시키지도 않으니 벌써 10년을 훌쩍 넘긴 일이다.




 암릉에 살짝 바위를 깎고 쇠줄을 설치하는 등 안전장치를 해 놓아 위험하지는 않지만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리라.

더구나 지금은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쌓인 상태 아닌가.

먼저 내려가 차례로 줄을 잡고 내려오는 일행들 사진을 찍어주고 거리를 줄인다.


 내려가다가 원효암을 만났다.

작은 암자로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박총무 친구 한 명과 내가 속도를 맞추어 걷는다.

그 친구는 참 가볍게 잘 걷는다.

하나도 힘이 안 들어 보이니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것일까?


사람이 오래 가지 않은 암자가

풀잎 속에 쓰러지듯 앉아있다.

누구를 향해서인지 밖으로 난 작은 길 하나

스님은 달빛 길을 쓸지 않는다.

경계가 없는 경내

잎사귀들은 제 살을 먹여 벌레를 기르고

저녁이 와도 산은 스스로

문을 닫지 않는다.

단지 산 안의 산의 파도가

흐린 안개 속에 잔다.


 이성선의 < 초암에서 > 전문



 오후 5시 시구문에 도착했다.

드디어 12성문 아래를 꼭꼭 발로 밟고 다닌 대장정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대서문에서 시구문까지 오는데 꼬박 8시간 걸렸다.

시구문은 시체를 내보냈다는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알고 있다.

남한산성에도 시구문이 있었지.

북한산성 시구문은 西暗門이라고도 불린다.


  당연히 기념사진을 찍어야 한다.

8명이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 사진이 엉망이기 십상이다.

대동문 사진도 그렇고.

그래도 하는 수 없지.

그나마 오가는 사람이 드문데 연세 지긋하신 분이 내려가시기에 부탁을 드렸다.

사진이 잘 나왔으려나?



거의 다 내려왔다.

험한 곳이 없으니 이제 마음을 놓아도 되리라.

뒷사람 신경쓰지 않고 성큼성큼 걷는다.

종일 고생한 발걸음이 희한하게 가볍다.

봄에 체중이 줄면서 체력까지 저하되어 걱정이 많았는데 회복된 것 같아 다행이네.


 다 내려가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데 한참 동안 일행들 소식이 없다.

마음이 느긋해져서 게으름을 피우나?

그때 내 뒤를 바로 따라오던 박총무 친구 한 명이 내려와서는 '우야꼬 선생님'이 미끄러졌단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소댕 보고도 놀란다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많이 다치지는 않은 것 같다는 말에 한숨 돌리고 일행을 기다린다.

 

 귀숙씨가 내려온 다음 보니 마사토에 미끄러졌다는데 티셔츠와 바지가 찢어졌다.

물론 옷이 찢어지는 바람에 몸은 찰과상 정도에서 그쳤지만.

귀숙씨도 다른 사람을 놀라게 했는데 상처가 깊지 않아 덜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

사실 어떤 사고이든 본인이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함께 한 사람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민폐가 되는 셈이니 다른 사람 위해서라도 다치지 말라는 말을 일쑤 하는이유이다.



 벤치에서 다 함께 짐을 추스르고 겉옷을 꺼내 입는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어스름이 깔린 시간 오늘 지나온 길과 시간을 반추할 겸 뒤풀이 장소를 찾아간다.


 주원이는 바로 집으로 가고 7명이 둘러앉았다.

걷는 동안 얼마나 먹었는지 시장끼가 없어 간단히 마른 안주와 시원한 맥주를 시켰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8명이 무사히(?) 북한산 12성문 돈 것을 축하하면서 맥주잔을 들었다.


 바로 석 달 전만 해도 청계산에서 진이 빠져 금세 쓰러질 것 같았던 박총무 체력이 대단해졌다는 사실을 오늘 확인했다.

박총무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박총무 친구들 또한 지리산을 함께 타면서 체력을 다진 것 같다.

오여사 체력은 새삼스레 말할 것 없이 어느 산이든 소화하는 체력이고 귀숙씨도 그 동안 꾸준히 운동을 했으니  문제가 될 리 없었지.

주원이는 평소 운동은 못 했지만 젊다는 것으로 버틸 수 있었을테고.

 초반에 박총무 스마트폰 액정이 깨지는 사고가 있었고- 새로 장만한 지 얼마 안 된 것이라 해서 매우 안타까웠다.- 후반에 귀숙씨의 경미한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정말 안전하고 즐거운 산행이었다.

평소에 술을 거의 안 마시는 귀숙씨는 오늘 마시는 맥주가 가장 맛있다고 한다.

물심양면 신경을 써준 박총무 친구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다들 고맙다.



덧붙임;  '우야꼬 선생님'에게 찢어진 티셔츠와 바지를 버리고 가라고 하니 산 지 얼마 안 되는 거라 아깝다고 한다.

찢어진 곳을 잘라내고 7부 티셔츠와 반바지를 만들어 입을 거라나.

기념 삼아 내년 여름에 그 반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기념산행을 하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