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5분, 푹 쉬고 다시 길로 나선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더니만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다.
햇살이 강하지 않은 것은 좋은데 비가 뿌리면 불편하기는 하겠지.
5분쯤 이정표를 따라 걷자 어제 확인하지 못한 해파랑길 안내판이 나왔다.
안내지도도 없으니 다시 한번 눈으로 확인하고 감포항을 뒤로 한 채 바닷가를 따라 걷는다.
고문님께서 틀어주신 음악소리와 파도소리가 섞인다.
하늘색과 잘 구별되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해변을 따라 생각 없이 걷다가 어느 틈에 안내 스티커를 놓쳤다.
바닷길을 가기에는 위험을 무릅써야 할 것 같아 울며 겨자 먹기로 뒤로 돌아 걷는다.
정신을 차려야겠군.
아침부터 '알바'를 하니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다행히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15분 정도 '알바'를 하고 산길로 들어섰다.
나즈막한 산길은 기분이 좋다.
신발 바닥에 느껴지는 흙의 촉감도 좋고,
바야흐로 봄이라고 이야기하는 들꽃도 좋고,
상큼한 공기도 좋고...
주변을 둘레둘레 돌아보며 걷는데 산마루에 파랗게 펼쳐진 보리밭이 보인다.
어디에 축사가 있나?
사람이 먹을 보리를 재배할 수도 있지만 가축 사료용일 가능성이 많아 큼큼 냄새를 맡아 본다.
가축의 분뇨 냄새는 나지 않고 대신 싱그러움이 물씬 풍긴다.
곳곳에 달린 리본이 친절하게 길을 안내한다.
여기는 경주 아닌가.
포항에서는 가끔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을 뿐 어디에서도 리본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엉뚱한 길로 가기도 하고, 가다가 길이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데 작고 하얀 꽃을 만났다.
가녀린 몸매를 자랑하는 꽃 이름을 떠올리니 도감에서 본 '산자고'가 떠올랐다.
도감에서만 보았지 실제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카메라를 들이댄다.
붉은 꽃대에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진 산자고.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고문님께서 벌써 멀리 가고 계시다.
산길에서 내려서서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허름한 골목을 지나자 생각하지 않았던 해변이 나타난다.
역시나 깔끔하게 데크가 깔린 길을 따라 걷자니 힘차게 달리는 말 모양을 조각해 놓은 것이 보인다.
경주에서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썼구나.
잘 단장된 전촌해변을 지나자 연이어 나정해변이란다.
'경주' 하면 오로지 불국사, 석굴암, 거대한 왕릉 등 신라 문화만 떠올렸는데 이런 해수욕장이 있다니 느낌이 새롭다.
깨끗한 길을 따라 걷는데 노래비가 나온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 보니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의 노랫말이 이곳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래쪽에 보이는 스위치를 누르면 노래가 나올 것 같아 꾸욱 눌러보았지만 고장이 났는지 묵묵부답이다.
나라도 노래를 불러볼까나.
입속으로 중얼중얼 아는 가사만 반복한다.
나 역시 '고장난 스테레오'네그려.
걷는 길 내내 감포 깍지길을 알리는 안내판이 자상하게 붙어 있다.
안내판 아래에는 그곳에 얽힌 역사와 전설 등의 설명이 붙어 있고.
하기는 해파랑길 11코스에 경주에서는 '역사를 걷는 파도길'이라고 부제를 달아 놓았다.
잠깐 솔밭으로 들어가나 싶더니 길은 해안가 자갈길을 걷게 만들다가 모랫길로 안내한다.
푹푹 빠지는 모랫길에서 힘들여 걷고 났더니 기운이 빠졌다.
잠깐 쉬어가자고 말씀드리고 자리를 잡았다.
간식은 역시나 계란과 커피.
쉬면서 충전을 하고 힘을 내 본다.
모랫길을 더 걷다가 다시 해안가 마을길로 접어들었다.
가는 길 중간중간에 있는 감포 깍지길 안내문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글을 쓴 '주인석'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진다.
향토사학자일 것도 같고, 이 지역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일 것도 같고...
어찌 되었든 '경주'에 대한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겠지.
해변을 따라 걷다가 어촌 골목골목을 돌아나가는 길이 이어진다.
중간중간 바위섬이 집과 집 사이로 빼꼼히 보이고 누가 심어 놓은 것처럼 소나무 한 그루.
고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바위섬의 소나무는 동해안을 걷는 내내 친구가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 비슷하겠지.
그런 풍경이 나오면 영락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니.
우리는 서로를 보지 못했는지 모른다
서로 바라보고 있다고 믿었던 옛날에도
나는 그대 뒤편의 뭍을
그대는 내 뒤편의 먼 바다를
아득히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섬이다
그대는 아직 내릴 곳을 찾지 못해 떠도는
저녁 바다 갈매기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내 밤은 오고 모두 아프게 사무칠 것이다
정일근의 < 쓸쓸한 섬 > 전문
사진 몇 장 찍고 나자 길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드는 도로로 올라선다.
벌써 점심때가 가까워졌나?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횟집 앞에 서 있고 우루루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내린다.
우리는 아침도 늦게 먹고 간식도 챙겨 먹었으니 일단 더 가야지.
복잡한 음식점 거리를 벗어나자 한쪽으로 비석들이 줄지어 있다.
여기는 어떤 공간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 보니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 선생과 제자들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우리 것을 찾아 제대로 알리는 역할을 하는데 앞장선 그런 분이 계시기에 우리가 지금 우리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새삼스럽게 그런 분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더불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을 통해 쉽게 우리 전통문화로 안내하는 유홍준 교수에게도 감사한 마음를 전하고 싶다.
한때 우리 땅 어디를 가든 그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국민들이 우리 문화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닌가.
자신만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쉽게 풀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학자의 또다른 역할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비석들을 꼼꼼히 훑어보고 나니 이제 해파랑길을 알리는 스티커는 산으로 올라가란다.
나즈막한 산이지만 올라가는데는 헉헉 숨이 찬다.
왜 허구한 날 산에 다녀도 이렇게 힘이 든 걸까?
몇 번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땀을 흘린 후 산마루에 선다.
바닷길만 걷다가 이런 편안한 산길을 만나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건 산사람이나 그런가?
잠깐 숨을 고르고 난 후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내리막길은 시원스럽게 쭉쭉 뻗은 대나무 터널이다.
그 속에 들어가면 저절로 서늘한 바람이 느껴질 것 같은.
올라오는 길에 인사를 하면서 지나가던 사람이 대나무 한 그루를 베어 어깨에 메고 가더니만 여기에서 베어낸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는 혹시 國유림이나 道유림, 아니면 市유림으로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금지된 곳 아닐까.
적어도 그렇게 큰 대나무를 함부로 베어내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행기, 산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파랑길을 걷다 (10코스- 경북 경주) (0) | 2015.04.17 |
---|---|
해파랑길을 걷다 (11코스- 경북 경주) (0) | 2015.04.17 |
해파랑길을 걷다 (13, 12코스- 경북 포항, 경주) (0) | 2015.04.14 |
해파랑길을 걷다 (13코스- 경북 포항) (0) | 2015.04.10 |
구룡포에서 (0) | 2015.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