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해파랑길을 걷다 (24코스- 경북 울진)

솔뫼들 2015. 1. 28.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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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지막히 일어나 짐 정리를 한다.

우선 친구 발부터 살핀다.

어제 저녁 간단한 처치를 하고 쉬어서인지 견뎌 보겠단다.

무리를 하지는 말라고 이르고 숙소를 나선다.

 

 길은 구산해변으로 이어진다.

해수욕장이 발달했으면 숙소가 많을 법한데 여기는 참으로 희한하다.

작은 해수욕장도 아닌데 그 규모에 비해 주변 시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역시나 솔숲을 갖춘 해수욕장이니 걷는 길도 좋을 수밖에.

발바닥을 간지럽힐 것 같은 모래사장을 걷다가 솔숲으로 발길을 옮긴다.

 

 

 솔숲을 지나자 작은 연못이 나오고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는지 살짝 언 연못 물에 아침 햇살이 반짝인다.

포근하다고는 해도 살짝 손이 시려온다.

겨울은 겨울이겠지.

 

 연못을 지나자 황보천을 따라 이어진 둑길이다.

마른 풀이 늦가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길이 시원스럽게 이어진다.

여기를 보면 영락없는 농촌이다.

 

 

 길은 도로를 따라 가다가 왼편 월송정 방향으로 꺾어든다.

이정표를 따라가자 애국지사 황만영 선생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황만영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독립지사였다고 한다.

평해 황씨의 본거지가 이곳인데 역시나 후손이 성공을 해야 조상들이 대접을 받는다니까.

 

 주변을 둘러 보니 소나무의 자태가 범상치 않군.

보는 이의 눈길을 끄는 소나무숲이 펼쳐져서 저절로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아름다운 숲 경진대회'에서 네티즌이 선정한 '아름다운 누리상'을 받은 곳이란다.

소나무의 기운을 받으려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번 솔숲을 바라본다.

 

 

 이제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으로 향한다.

월송정은 신라시대 화랑들이 달빛을 받으며 놀았다고 하는 곳에 고려시대 지은 정자이다.

月松亭, 또는 越松亭이라고 쓰는데 '달빛과 어우러진 솔숲'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정자로

1980년대에 옛 양식을 본떠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월송정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반해 조선시대 숙종, 정조, 안축, 이곡 등이 시를 남겼다고.

 

 월송정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

해파랑길을 걷는 동안 수많은 정자와 만났다.

정자는 하나같이 바다를 앞에 두고 풍광이 좋은 곳에서 소나무를 벗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의 정자 문화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셈이다.

욕심을 덜어내고 자연과 벗하며 안빈낙도하는 삶을 추구했던 선조들의 삶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하다.

 

 

 월송정에서 내려와 잘 닦인 길을 따라 걷는다.

걷다가 다리 위에 섰다.

황보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만들어진 절경은 내 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 주변에 어우러진 솔숲, 일부만 언 강물, 그리고 마른 풀이 만들어내는 쉼표에

물빛과 같은 하늘 빛깔까지 부족함 하나 없는 완벽한 연출이었다.

카메라로, 휴대전화로 연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도 그림 한 점 그려 넣는다.

 

 

 앞서가시던 고문님께서 갈림길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해변으로 이어질 것 같던 길이 나즈막한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바다를 보다 질릴 것 같으면 산으로 안내하는 것 같아 반갑다.

낮은 산을 넘어가자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는 어촌이 나타난다.

 

 마을에 있는 정자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아 신발을 신고 올라가려니

바로 앞에 있는 집에서 우리를 바라보시던 어르신께서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이 매일 정자를 닦는다는 말씀과 함께.

망설이다가 잠깐이라도 편히 쉬자는 생각에 신을 벗고 올라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리 오래 걷지는 않았지만 편하고 좋구만.

 

 

  바닷바람을 맞으며 간식을 먹고 여유를 찾는다.

어촌에는 소득 증대를 위한 차원인지 집집마다 민박이라는 팻말을 단 집이 많다.

오는 길에 '우리집 같은 민박'이라는 이름이 정겨워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자손이 떠나고 빈 방을 제공하는 수준이겠지 싶은데 과연 사람들이 많이 찾을까 의문이 든다.

전문적인 펜션과 캠핑이 대세인 시대에 오래된 낡은 집들에 달린 민박이라는 글씨가 쓸쓸해 보인다고나 할까.

 

 다시 몸을 일으켠다.

오늘도 파도는 내내 으르렁거린다.

해변을 핥아내는 파도에 곱디 고운 모래사장이 드러난다.

매번 파도는 모래사장에 다른 무늬를 그려 놓는다.

파도가 만들어내는 무늬가 예뻐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날마다 쉴 틈 없이
                                            모래를 일어 대는 파도

 

                                            바다는 누구를 위해
                                            밥을 지으려는 걸까요

 

                                            모래알 말갛게 씻어
                                            바다가 지어 놓은 모래밥

 

                                            갈매기가 콕콕콕 쪼아 보고
                                            달랑게가 쓰윽쓰윽 헤쳐 보고

 

 

                                               민현숙의 <모래밥> 전문

 

 

 그러다가 어릴 적 모래사장에서 모래 장난을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거북아, 거북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 하면서 주먹 위에 모래를 덮었다가 손을 빼내면 작은 동굴이 생기곤 했었지.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걷기에 바빴다고는 하지만

바닷물에 손 한번 담그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