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코스에 마침표를 찍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도 도로를 따라 걷는 줄 알았는데 왼편 논둑길을 거쳐 산을 향해 올라가는 길로 이어져 있는 모양이다.
걸으면서 보니 친환경 농업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세계 친환경 농업 엑스포가 울진에서 열렸다더니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친환경 농업을 권하고 있는 것 같다.
친환경 농업을 통해 사람도 살고, 다른 생명도 살리는 농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든다.
파란색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야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오랜만에 흙길을 밟았다 싶었는데 점점 길이 깊은 곳으로 안내한다.
또 산인가 보다 했더니만 제대로 된 산은 아니고 잡목이 우거진 언덕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이 요상하다.
잡목과 마른 풀이 우거진 흙길인 것은 그래도 마음에 드는데
가파른 길이 이어지더니만 아뿔사! 길이 무너져 버렸다.
어쩌란 말인가.
도저히 무너진 길로는 갈 수가 없다.
결국 무너진 길은 포기하고 약해 보이는 나무 뿌리를 잡고 길이 아닌 곳으로 기어올라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 선두에서 살짝 나무 뿌리를 잡아 본다.
그리 많이 나가지는 않지만 내 체중을 견딜 수 있는지 확인을 해야겠지.
가늘기는 하지만 보기보다 강한 나무 뿌리를 잡고 낑낑대며 올라간다.
사실 조금 불안했는데 겨우 올라가서는 황당해 하는 친구에게 올라오라고 했다.
나보다는 체격이 크지만 나무 뿌리를 믿어 보라고.
스틱을 미리 받아주고 확신을 주면서 일행이 모두 올라왔다.
휴! 진땀이 났었는데 이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이 길을 기획하고 만든 주최에서는 길이 이렇게 된 줄 모르겠지.
위험한 길을 걷기 좋은 길이라고 홍보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을 한다.
게을러서 생각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는 못 하지만 걸으면서 부딪히는 문제점을 해파랑길 홈페이지에 신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큰 길로 올라서고 나니 한적한 도로가 나오는데 울진 공항이 가깝게 있단다.
그래서 그렇게 비행기가 낮게 뜨고 소음이 심했구나.
작은 나라에 생각보다는 비행장이 많다.
올라왔으니 이제 내려가는 길이다.
내려가는 길에 발가락이 앞으로 쏠려 더 괴롭다고 친구는 인상을 쓴다.
나도 그렇기는 하지만 견딜 만한데...
마을 옆을 따라 걷는다.
걷는 길 옆 나뭇가지에 붙은 노란색 리본에 눈길이 간다.
눈에 익숙한 것이 강원도 고성에서부터 만난 리본이다.
우리보다 좀 일찍 이 길을 걸은 것 같은데 한동안 못 보면 공연히 섭섭해질 만큼 친구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리본을 매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 길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우리는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걷고 있지만 가끔은 이런 흔적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길은 다시 해변을 따라 이어진다.
동지가 지나고 해가 쥐꼬리만큼씩이라도 길어지니 그래도 다행이다.
가면서 눈길은 이제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느라 바쁘다.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적당한 숙소가 없어서 고생한 적이 몇 번이던가.
구산항 근처에 가면 묵을 만한 곳이 있을 거라 했는데...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확인하신 고문님께서
그리 만족할 만하지는 않지만 조금 더 걸으면 숙소와 식당이 있다고 하시면서 먼저 앞으로 가셨다.
구산항에는 무언가 있으려니 했더니만 겨우 민박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을 회관에 마련된 체험학습용 숙소 정도.
친구는 정말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걷는다.
안쓰럽지만 도와줄 방법이 없네.
고문님께서는 구산항을 지나 구산해변 입구에 식당과 숙소가 있다면서 조금만 더 걸어오라고 하신다.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낮은 산 너머로 넘어가는 해로 붉게 불든 어촌.
마을은 평화스러워 보이는데 내 마음은 전혀 평화롭지 못 하다.
친구 걷는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걷는다.
나무 한 그루와 함께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무슨 조형물이 눈에 띄어 사진을 찍으면서.
조급하고 조금은 불안한 내 마음과 달리 바다는 조용히 저물고 있었다.
바닷가 회집 유리창 너머
하늘의 로동을 마친 태양이
키작은 소나무가지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있다
그 모습을 본 한 사람이
“솔광이다!” 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좌중은 박장대소가 터졌다
더는 늙지 말자고
“이대로”를 웨치며
부딪치는 술잔 몇순배 돈후
다시 쳐다본 그 자리
작은 소나무도 벌겋게 취해있었다
바다물도 눈자위가 벌겋게 죽죽 했다
허형만의 < 노을 > 전문
숙소의 불빛을 확인하고 고문님께서 손짓하시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손님이라고는 달랑 우리 일행뿐인데 주인은 특별히 반가운 기색도 없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해도 손님 입맛 따라 다르다고 - 맞는 말이기는 하다. - 퉁명스럽게 말하고 가자미 찌개를 시키니 안 된다고 한다.
음식점 주인 인상도 별로 좋지 않고 친절하지도 않지만 마땅히 다른 갈 곳이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잡고 낙불 전골을 시켰다.
종일 걷느라 지쳤는데 음식은 오래 뜸을 들인 후 나왔다.
대신에 국물맛도 좋고 양도 많았다.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젊은 여주인 입장이 이해가 된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음식점을 하게 되었는데 7번 국도가 외곽으로 나면서 손님이 끊겼고,
그러다 보니 인건비를 줄이려 혼자 장사를 하는데 단체 손님이 몰리면 힘에 부친다고.
평소에는 별로 손님이 없으니 식재료를 모두 갖추어 놓는 것도 무리라는 말이다.
음식맛이 좋으니 친절하기만 하면 장사가 잘 될 것 같다고 하니 본래 그렇게 생겼고 말도 없는 편이라 하는 수 없단다.
수면제 삼아 복분자 막걸리까지 시켜 먹고는 숙소로 향한다.
숙소는 허름해 보여도 관광공사 인정 '굿스테이' 마크가 붙어 있었다.
믿어도 되겠구만.
여기 외에는 갈곳이 없으니 가릴 형편이 못 되기는 하지만.
친구는 물집 잡힌 발바닥이 불편해 자신도 모르게 발의 다른 면을 사용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물집이 더 많이 잡혀 있었다.
정말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그 발로 내일 걸을 수 있을까?
친구의 발 상태가 어떻게 될까 걱정이다.
물집을 터뜨리고, 연고를 바르고, 압박붕대로 감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처방을 다 하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 그나마 조금 나아지기를 기대하면서.
고생했다 친구.
오늘 28km를 그 발로 걸었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랴.
무심한 대신 무던한 성격이니 말없이 걸었겠지.
다행히 잠자리 안 가리고 잠은 잘 자니 푹 주무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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