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르고 별러 종로 5가에 위치한 두산아트센터에 연극 '하얀 앵두'를 보러 갔다. 연극이 작년에도 공연되었다는 사실은 몰랐고 이번에 공연 개막 전부터 꼭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제목이 '하얀 앵두'이다. 세상에 하얀 앵두가 어디 있담? '소멸'에 대한 연극이라는 평이 여기저기 실리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연극이 시작되자마자 등장하는 흰옷 입은 노파를 보면서 죽음에 대한 것이구나 실감이 났다. 요즘이야 喪家에서 흰옷 보기도 힘들지만 우리 민족에게 素服은 바로 죽음과 연관되지 않는가. 대학시절 학교에서 공모한 문학상 수상작에서 '흰나비'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쫓아가던 주인공이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이야기를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만큼 흰색은 우리에게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색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큰 수술 후 영월로 내려와 요양을 하고 있는 작가 반아산,
연극 연습 때문에 주중에 서울에 있다가 주말에 내려오는 반아산의 부인 하영란,
두 사람의 입양한 딸 반지연,
반아산의 후배이자 지질학자인 권오평,
대학교수 권오평의 조교이자 대학원 박사과정인 이소영,
동네 노인 곽지복,
반지연이 다니는 학교의 도덕 교사이자 나중에 반지연의 남편이 되는 윤조안,
그리고 반아산이 사는 집의 전 주인이었던 마님 송도지.
이런 인물들이 펼쳐내는 이야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반아산의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가 살던 집의 하얀 앵두를 맺던 나무는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고, 반아산이 애지중지 하던 진돗개 원백도 죽음을 맞는다. 다행히 곽노인집 개에게서 2세를 봄으로써 어떤 緣을 남긴다.
또 어떤가. 권오평은 교환교수로 유럽을 가 있는 동안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암으로 죽은 부인을 잊지 못해 혼자 산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까이 가려 노력하는 조교 이소영에게 마음이 기울지만 훌훌 떨쳐버리지를 못 한다.
동네 노인 곽노인은 오래 전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하고 나오자 가족이 그를 버리고 떠났음을 알게 된다. 떠돌던 그를 돌봐준 것이 반아산이 사는 집의 전 주인 영감님. 그에게 삶은 덧없다. 애면글면 목맬 것도 없고 세상 모든 일이 뜬구름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반아산이 사는 집에 정성껏 나무를 심음으로써 자신을 구해준 영감님께 은혜를 갚고 싶어하고 뿌리를 내려 생명을 전파하고 싶어한다.
반지연은 학교 선생 윤조안과 눈이 맞아 학생 신분으로 임신을 한다. 물론 부모는 펄펄 뛰지만 그런 과정에서 지연이 그들의 친딸이 아님이 드러나고 생명의 잉태를 통해 어떤 희망을 본다.
곽노인이 툭툭 던지는 말에서는 곰삭은 인생의 맛이 느껴진다. 산전수전 겪고 죽지 못해 살아간다면 죽음이 그리 두렵지도 않으리라.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의 곽노인 대사가 둥둥 머리 속을 떠다닌다. 서러울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고 그런 것이 인생 아닌가. 찌그러진 양은 개밥그릇과 개집이 한쪽에 자리잡고 수평이 안 맞는 평상이 전부인 무대에서 인물들의 연기로 승부하는 2시간 20분의 연극은 지루한 줄 모르고 이어진다.
죽음과 탄생. 그것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자연스러움의 일부가 바로 죽음이고 소멸 아닐까. 그렇지만 소멸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탄생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에 세상이 살 만하고 희망이 있겠지. 돌아보면 늘 사람 사는 세상은 우여곡절과 희비가 엇갈리지 않는가. 그래도 사람들은 내일이면 무언가 좋을 일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 간혹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희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연극을 '소멸의 연극'이 아니라 '희망의 연극'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면서...
극작가 배삼식의 작품은 내 머리 속에서 이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믿어도 되는 원작에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가 뒷받침된다면 불경기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것을 이 연극은 보여준다. '벽 속의 요정'을 통해 알게 되었던 작가를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열렬히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더 좋은 작품을 기대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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