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형!
억새 구경을 하다가 잠시 눈이 환해졌습니다.
개쑥부쟁이가 무리지어 피어 있었거든요.
개쑥부쟁이는 화사한 보랏빛으로 억새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습니다.
억새를 보러 왔지만 선물처럼 보이는 다른 들꽃도 고맙지요.
설렁설렁 억새를 따라 춤을 추듯 걸어갑니다.
코 끝에 스치는 바람이 기분을 한없이 들뜨게 만들어 줍니다.
언뜻 보면 은빛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은 억새 평원이 이어집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을 풍경 속으로 푹 빠집니다.
마냥 이 시간이 이어졌으면 좋겠군요.
산을 오르다 보면 억새는
언제나 산을 향해 머리를 푼다
은빛 웃음으로 조아리는
한 움큼 이별의 말씀,
산 위로, 산 위로만 올려보내는 춤사위
풍경 한 폭 멈춰선 산허리 어디쯤,
큰 고요가 서러워서
저토록 머리 풀고 이별을 손 흔드는 것인가?
산굽이 돌아 바라만 봐도 오싹해지는
저, 초록 물빛 선선한 바람 따라
동동하게 여문 가을 들녘,
무더위 밀어내고 일어선 황토길에
보송보송 목화송이 하르르 하얀 웃음 흩날리고,
덩달아 나도 하얗게 흔들리고.
박종영의 < 하늘 억새 > 전문
가는 길 왼편으로 커다란 웅덩이처럼 움푹 들어간 곳이 보입니다.
'돌리네'라고 하는 곳입니다.
이 지역은 5억5천만년(고생대 캄브리아기) 전에 얕은 바다에서 퇴적된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석회암은 빗물에 쉽게 녹는다고 하네요.
석회암이 녹으면서 표면이 웅덩이처럼 들어간 곳을 '돌리네'라고 하고요.
모두 편평한 땅이 아니라 쑥 들어간 곳도 있고, 불쑥 튀어나온 곳도 있으니 경치는 더욱 볼 만합니다.
오전 11시 55분, 드디어 민둥산 정상(해발 1,119m)에 도착했습니다.
어느 산을 가나 그렇지만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긴 줄이 만들어졌습니다.
30분쯤 기다려야 차례가 올 것 같습니다.
우리도 줄을 서자니까 친구는 그냥 교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순간을 포착해 사진을 찍자고 하는군요.
모르는 사람들이 섞여들기도 해서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그러기로 했습니다.
내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과 민둥산 표지석을 잘 포착해야지요.
대충 사진을 찍고 바람을 피해 어렵게 한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해발고도가 높아서인지 바람이 부는 곳은 서늘하더라고요.
겉옷을 챙겨 입고 준비해온 점심을 먹으면서 잠시 쉽니다.
정상 부근은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는군요.
시간이 늦지는 않았지만 하산을 하기로 합니다.
오후 12시 30분, 이정표를 따라 증산초교 방향으로 접어듭니다.
조금 섭섭한 마음에 뒤를 돌아다보면서 발길을 옮깁니다.
앞길에도 능선이 이어지며 억새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 길을 헉헉대며 올라오는 사람들을 보니 새삼스레 하산을 하는 우리가 여유롭다 싶습니다.
이 시간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꽤 많군요.
증산초교에서 올라와 다시 그 길로 내려가는 모양입니다.
증산초교로 내려가는 길 중에서 거리가 급경사는 2.6km, 완경사는 3.2km라고 합니다.
시간도 넉넉하고 바짝 긴장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우리는 완경사를 택했습니다.
완경사로는 오른편으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가는 길에 보니 멋지게 자란 커다란 소나무 아래 쉼터가 보입니다.
잠깐 쉬고 싶은데 올라오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았네요.
쉴 데가 마땅치 않아 계속 걷습니다.
그나마 완경사로를 택했는데도 길은 경사가 급합니다.
전에도 이러했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길은 좁은데 급경사이고 쉴 곳도 없으니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른편으로 낭떠러지라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고요.
그 와중에 어쩌다 꽃이 보이면 잠깐이나마 카메라를 가져다 댑니다.
벌이 윙윙거리는 보라색 꽃향유가 가장 많습니다.
꽃향유는 꿀풀과에 속하는 밀원식물로 이맘때면 어디에서든 눈에 들어오지요.
희한하게 꽃이 한쪽에만 몰려 피는 특이한 꽃입니다.
방아라고도 부르는 배초향과 비슷해서 늘 헷갈리는 꽃입니다.
배초향은 사방을 빙 둘러 꽃이 피거든요.
그러고 보니 오늘 본 꽃이 거의 보랏빛이었네요.
정말 정신없이 걸었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본의 아니게 1시간만에 다 내려왔군요.
서울로 출발하는 시간이 1시간 30분이나 남았습니다.
휴! 급경사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발에 힘을 주었는지 다리가 뻐근합니다.
주차장 부근에서 배낭 정리를 하고 잠시 쉬면서 제대로 만들어진 안내판을 보니 전에 발구덕으로 올라갔더군요.
이름이 특이하다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때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았다는 기억이 납니다.
물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고요.
워낙 오래 되기는 했네요.
그리고 제 기억을 이제는 저도 신뢰할 수 없으니 어떤 것도 강하게 주장할 수 없게 되기는 했습니다.
천천히 걸어서 억새 축제장으로 향합니다.
안내산악회 버스는 그곳에 주차를 한다고 했었지요.
강원도임에도 한낮 기온이 섭씨 25도를 훌쩍 넘겼고, 쉬지도 못하고 계속 걷다 보니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갈증이 심해 우선 아이스커피를 파는 곳으로 갔습니다.
아이스커피를 냉수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니 갈증이 좀 가시는 듯 합니다.
더위를 식힌 다음 그래도 강원도에 왔으니 감자전을 먹어야 한다면서 음식을 파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지역 축제장 음식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실망스럽습니다.
작년 이맘때 두타산 입구에서 먹은 감자전 생각이 나는군요.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는데 오래 걸린다 싶었더니만 감자를 강판에 금세 갈아 만들었다는데 정말 아껴 먹고 싶을 정도였지요.
평생 먹은 감자전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친구와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 감자전 생각이 났습니다.
슬슬 몸을 일으켭니다.
출발시간이 다가왔거든요.
정확하게 오후 3시에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버스는 달립니다.
도로가 많이 막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눈을 감습니다.
버스는 여주휴게소에 잠깐 들릅니다.
여주휴게소는 처음 와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이 한글날이라서인지 휴게소 앞에 장식한 한글 자음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여주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겠지요.
대부분의 관광버스에서는 휴게소에 들렀을 때 쓰레기를 정리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여주휴게소에서는 관광버스가 서자 쓰레기를 치우는 분들이 쓰레기통을 막아서며 쓰레기를 못 넣게 하는군요.
그런 쓰레기가 엄청나기는 할 겁니다.
각자 집으로 가져가라고 하는 것일텐데 좀 야박해 보이기도 합니다.
도로가 좀 막히는가 싶었는데 예상보다는 버스가 잘 달렸습니다.
지난 주 징검다리 연휴가 있어서 이번 주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덜 움직였는지도 모르지요.
오후 6시 45분경 사당역에 도착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저녁까지 챙겨 먹고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 뿌듯하군요.
하루를 잘 채운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가을 풍광 속으로 푹 젖어든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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