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0시 5분, 팔각정에 도착했다.
팔각정 주변에는 이정표와 빨간 우체통, 명성산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명성산 표지석에는 여기가 정상인 것처럼 해발고도가 923m라 되어 있다.
여기까지만 다녀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여기 해발고도를 써 놓고 그 옆에 따로 정상 해발고도를 쓰는게 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도 있네.
친구와 햇살 고운 양지쪽에 앉아 풍광을 즐기며 귤 몇 개를 까 먹는다.
지금까지 온 길보다 정상까지 가야 할 길이 더 힘들 수도 있으니 힘을 내려면 에너지 보충도 하고 쉬어 주기도 해야겠지.
지난 밤 묵었던 숙소가 지은 지 오래 되었는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에 난방이 부실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 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그래도 컨디션이 괜찮은 편이네.
계속 올라가는 길이고 햇볕이 좋으니 다운 재킷은 벗어서 배낭에 걸친다.
겨울이라고 하더라도 땀이 나니 체온 조절을 잘 해야겠지.
억새가 나부끼는 경사진 산자락에 앙상한 가지를 흔드는 나무들이 눈물겨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발 아래 억새밭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부지런히 발을 옮기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 한 그루와 단순한 의자 하나가 빚어내는 그림이 아름답다.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으면 더 좋겠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빈 의자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걸.
얼마 전 TV에서 하는 의자에 관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사람마다 의자에 대해 생각하는게 그리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산에 있는 의자는 힘든 산꾼들에게 쉬어가라는, 경치를 구경하며 한숨 돌리라는 의미겠지.
태어나서 한번도 두 발로 걸어보지 못했다
다리가 넷이라는 것이 불행의 이유가 될 수도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는 앉아 있다
그가 누구를 앉힐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을 누구보다 잘하기 때문,
그는 앉은 채 눕고 앉은 채 걷는다
혹은 앉은 채 훨훨 날고 있을 때도 있다
그를 오래 보고 있으면
조금씩 피가 식고 눈은 밝아져
그가 입을 열 때까지 하냥 기다릴 수도 있다
스물 여섯 도막의 통나무가 한 그루 의자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못에 찔려야 했는지,
그 굳어가는 팔다리 속에 잉잉거리는 게 무엇인지,
그러나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알 것만 같다
며칠 전부터 상처를 들락거리며
날벌레가 슬어놓고 간 알들을 깨우려고
햇빛은 자꾸만 그의 등뒤로 와서 내리쬐는 것이었다
한 그루 나무에게 그렇게 하듯이
나희덕의 < 한 그루 의자 > 전문
길은 조금씩 험해진다.
긴장을 하라고 경고를 하는 것 같다.
먼지를 풀풀 날리는 산길, 햇볕에 녹아 질척거리는 길, 제법 눈이 쌓여 미끄러운 길...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산길에 순간순간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네.
아이젠까지 준비하기는 했지만 신경이 쓰인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오르막길을 올랐나 싶자 한동안 키작은 나무 사이로 난 편한 길이 나타난다.
이런 길도 있었군.
방심을 하려는 찰나 길은 아래로 쭉 이어져 있다.
결국 다시 올라야 하니 한숨이 나오는데 눈과 얼음이 섞인 길에 밧줄까지 매달려 있네.
바짝 긴장을 하고 줄에 매달려 바위를 기어오른다.
앞만 보고 마냥 걷는 길보다는 가끔 이런 길이 있어야 재미가 있기는 하다.
다시 이름도 없는 봉우리 하나를 넘은 것 같다.
친구는 저기 보이는 게 삼각봉 맞는 거냐고 묻는다.
저도 모르거든요.
거리를 보건대 눈으로 보이는 봉우리 너머에 있을 것 같은데요.
이정표를 보면 삼각봉까지 거리는 고무줄마냥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제멋대로군.
관리가 아주 허술하다.
산에서는 이런저런 설치물보다 정확한 거리 표시가 더 중요한 것 아닌가.
투덜거리며 가다 보니 앞 봉우리에 아스라하니 표지석이 보인다.
사람들 몇몇이 주변에 오가는 것도 보이고.
오는 내내 사람을 거의 못 만나서 그런지 사람들이 반갑다.
중간에 잠깐 헷갈려 샛길로 빠진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다니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
주루룩 내려갔다 있는 힘을 짜내다시피 하면서 삼각봉(해발 906m)에 오른다.
무릎이 약간 시큰거려 팔각정부터 여기까지는 힘이 들었다.
그래도 삼각봉에서 정상은 코 앞이니 한결 마음이 느긋해진다.
삼각봉 표지석 앞에서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고 잠시 간식을 먹는다.
양갱과 초콜릿으로 배를 채우고 힘을 내어야지.
친구는 배가 고파 많이 힘들었단다.
몸에 비축된 지방이 없어서인지 친구는 허기가 지면 금세 표정이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지방을 몸 한 구석에 좀 쌓아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제 정상을 향해 걷는다.
내가 가진 지도나 안내판 지도에서는 삼각봉에서 정상이 꽤 멀게 느껴졌는데 이정표를 보니 실제로는 그리 멀지 않다.
다행이구만.
오전 11시 30분, 명성산 정상(해발 923m)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우리 외에 아무도 없다.
역시나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어주고 주변을 살펴 본다.
안내판에 따르면 여기는 포천이 아니라 철원이라고 한다.
명성산이 포천과 철원에 걸쳐 있는 셈이다.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수도가 철원이었지.
여기저기 궁예에 관한 전설이 떠돈다.
안내판을 보면 궁예봉, 궁예능선, 궁예약수 등등 궁예에 관련된 명칭이 많다.
'궁예의 침전'이라는 곳도 있네.
궁예가 숨어 지내던 곳이었을까?
아무튼 궁예의 슬픔을 안고 있는 산이라고 생각하니 느낌이 좀 다르다.
낮 12시도 안 되기는 했지만 배가 고프다.
정상 아래쪽 벤치에 앉아 준비해온 빵과 인스턴트 스프로 점심을 대신한다.
열심히 에너지를 보충해야 또 내려가겠지.
내려갈 때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던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빵을 먹고 있는데 이번에도 야영객인지 무지막지한 배낭을 둘러멘 커플이 올라왔다.
사진을 찍더니 우리 옆 벤치에 앉아 먹을거리를 꺼낸다.
이미 어디선가 야영을 하고 올라오는 길이라고 한다.
어디에서 올라왔느냐고 우리에게 묻더니만 다음에는 철원에서 오는 코스를 시도해 보란다.
경치가 아주 멋들어진다고 하면서.
산정호수에서 올라오는 길은 고속도로 수준이라고 하는군.
헉! 우리는 아주 편한 고속도로를 힘들여 왔다는 말이네.
속으로 기분이 좀 나빠지는걸.
산안고개로 하산을 할까 생각중이라고 하니 힘든 코스가 많다고 한다.
우리보다는 명성산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다 싶어서 다시 오던 길로 가다가 팔각정에서 책바위 코스로 하산하기로 한다.
이 겨울에 모험을 할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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