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주상절리가 펼쳐진 곳을 따라 내려왔다.
담쟁이덩굴이 돌을 뒤덮은 모습이 예뻐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하고, 가끔 뒤돌아 내가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라 머리 속에 꼭꼭 새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산에는 우리 외에 아무도 없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려니와 월요일이기도 해서 그렇겠지.
우리나라에서 암괴류가 가장 넓게 분포한 곳이 이곳이라는데 아무런 보호문구도 없어서 갸우뚱해진다.
지질학적으로 분명히 보전가치가 있는 곳일텐데 이래도 되는건가?
고성군은 재정이 열악해 여력이 없다고 해도 국가 차원에서 나서야 하는 일 아닐까.
잘 다녀오고 공연히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진작 관리가 잘 되었다면 내가 그 바위를 가로질러 가며 내려오지도 못 했겠지만.
우리가 그 바위를 건너뛰어가며 가는 마지막 산꾼이 아닐까 하면서 친구와 마주보고 웃었다.
운봉산(해발 285m)에는 용암의 분출로 생성된 현무암이 암괴류를 이루고 있다. 암괴류는 수많은 암석 덩어리들이 사면의 최대경사방향 또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듯한 모양으로 쌓여 형성된 지형이다. 약 720~750만년 전(신생대 제 3기)의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이 지역의 현무암은 지표에서 빠른 속도로 식으면서 다각형 모양의 기둥(주상절리 柱狀節理 collumnar )이 발달하였고, 주빙하 환경에서 기계적 풍화작용을 받은 주상절리가 붕괴되면서 운봉산의 암괴류를 형성하였다. 운봉산 암괴류는 우리나라에서 주빙하 환경에서 발달한 지형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화석지형(fossil landform)이다.( 안내문 내용)
오전 11시 45분, 다 내려왔다.
3시간 가량 걸린 셈이다.
길은 군부대로 이어진다.
새로 짓는 막사와 오래 된 막사가 앞뒤로 있는 곳을 지나 내려와 보니 고성군 관광안내지도판이 서 있고, 하루에 몇 번 오가는 버스 시간이 적혀 있었다.
버스를 타려면 1시간 가량 기다려야겠군.
풍광이 그다지 좋지도 않은 군부대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보다 차라리 걷는게 낫겠다 싶어서 길로 나선다.
간혹 군인들 면회차량인 듯 싶은 차량과 군사용 차량이 오가는 가을길을 따라 걷는다.
길 옆으로 흐르는 개천물 소리도 익어가는 가을 들녘이다.
가다가 동네 초입에 서 있는 정자를 만났다.
이름이 뒷골정이다.
동네 이름이 뒷골이라는 말이겠군.
무척이나 소박하고 정겨운 이름이다.
건너편은 앞골이겠거니... 후후.
생각해 보니 점심을 못 먹었다.
여기에서 쉬면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점심이라고는 어제 해파랑길 행사 차량에서 나누어준 시루떡과 준비해온 구운 계란, 그리고 인스턴트 스프와 사과이다.
배가 고팠던지라 허겁지겁 손이 바쁘다.
근처 밭에서 농사일을 하시는 분이 우리들 모습을 별일이라는 듯 바라보는게 느껴진다.
배를 채우고 나서 무공해 바람을 즐긴다.
눈, 코, 귀가 모두 자유롭고 즐거운 이곳에서 포만감에 늘어져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싶다.
하지만 갈 길이 멀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길로 나선다.
조금 걷자 도로변에 번듯한 한옥이 한 채 나타났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주인이 꽤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
집을 감싼 돌담도 보기 좋고, 오래 되어 색이 짙어진 나무 대문이며 집안의 석등도 아담하고, 창호지문도, 돌절구도...
모두 鄕愁를 자극하는 것들이다.
게다가 키작은 소나무와 향나무를 심어 집에 운치를 더했다.
이 집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러다가 이 집의 분위기와 닮은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담 너머로 집을 훔쳐보다가 이내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에 관심 없는 친구는 저만치 앞서서 걷고 나는 친구를 따라가느라 걸음을 재촉한다.
바람만 오가고 풀벌레소리만 들리는 시골길이다.
가다가 나무가 휘어지도록 열매를 매단 대추나무와 친구를 하고,
길섶에 떨어진 밤을 줍느라 한동안 눈과 손이 바쁘기도 하고...
이걸 까서 밥에 넣어 먹으면 맛이 좋겠군.
바야흐로 오곡이 풍성한 가을이다.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샜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공광규의 < 욕심 > 전문
콧노래를 부르며 차도를 따라 걷고 있는데 앞쪽에서 버스가 달려온다.
저 버스가 한 바퀴 돌아오는 걸 타야 하겠지.
아무래도 하루에 몇 번 있는 버스이다 보니 한 대가 종일 오갈 것 같다고 하며 버스 안을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우리를 내려준 운전기사가 웃으며 손을 흔든다.
월요일 아침부터 버스에서 운봉산 들머리를 찾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겠지.
저 버스가 언제 돌아올까
싶어 우리는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한다.
하늘은 순식간에 비를 뿌릴 듯 검은색으로 변한다.
설악산쪽에는 한줄금 소나기라도 내리겠는걸.
낯선 시골길임에도 모든게
여유로워 그런지 그런 날씨 변화조차 그다지 긴장이 되지 않네.
나지막한 산에 걸렸던 구름이 다시 흩어지고 햇살이 비치는 길을 따라 걷는다.
간혹 도로변에 조성된 공원 한쪽에 고장난 탱크와 장갑차가 떡 하니 서 있다.
그런 것은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유사시 적에게 위협을 주는 기능도 있다는 친구의 설명이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이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오후 1시 35분, 더 이상 걷기 싫다.
도로 한곳에 마련된 쉼터 소나무 그늘에 기대어 발길을 멈춘다.
아까 지나간 버스 올 때가 되었는데...
운봉산 입구에 적혀 있던 버스 시간은 진작에 지났다.
시골버스답다.
그래도 느긋한 건 지방 여행을 다니면서 그런데 많이 익숙해져서 그런가.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바람에 몸을 비비는 벼이삭들을 바라보면서 서성인다.
그러다가 저만치 달려오는 버스를 보고는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었다.
이런 시골에서는 다행히 버스 정류장 아닌 곳에서도 버스가 세워 주더라.
이제 흔들리면서 속초 고속터미널로 가면 된다.
솔솔 졸음이 쏟아지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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