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15분, 드디어 본격적인 하산 시작이다.
호수를 오른쪽에 두고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호수가 더 눈에 잘 들어온다.
수면에 반짝이는 초가을 햇살을 바라보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저 너머 산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호수는 또다른 풍경을 선사하리라.
앞만 보고 걷지 말고 그렇게 즐겨야 하는데 낯선 산에 오면 그럴 만한 여유가 없는게 아쉽다.
정면 꼭대기에는 알록달록한 건물의 카페가 들어서 있다.
거기에서도 호수와 산의 풍광을 즐기며 향기 좋은 차를 마실 수 있겠군.
좋은 곳은 늘 그렇게 눈밝은 사람들이 선점을 하지.
물론 어디든 우리처럼 발로 밟으며 느끼는 것만은 못 하겠지만.
전국 많은 길을 걸으며 느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차를 타고 다닐 때는 단편적인 것만 보였는데 머리 속에 지도를 그려놓고 하나하나 발로 꼭꼭 밟아가니 정말 우리 산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내 몸에 담겨 온다는 것.
바로 느림의 미학이겠지.
네가 길이라면 나는 길
밖이다 헝겊 같은 바람 치렁거리고
마음은 한켠으로 불려다닌다
부드럽다고 중얼대며
길 밖을 떨어져 나가는
푸른 잎새들이 있다 햇살이
비치는 헝겊에 붙어, 말라가는
기억들 가벼워라
너는 한때 날 가로수라고
말했었다, 길가 가로수
그래, 그리하여 전군가도의 벚꽃쯤은
됐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봄날의
한나절 꽃들의 투신 앞에서
소스라치는 절망과 절망의 그 다음과 같은
화사함을 어쩌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길의 밖일 때
너는 길이었다
내가 꽃을 퍼부어대는 가로수일 때
너는 내달려가는 길, 아니
그 위의 바퀴 같은 것이었으니
오히려 길 밖이 넓다
길 아닌 것이 오히려 더 넓고 넓다
이문재 시 < 길 밖에서 > 전문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상천역까지 3.6km라고 하지만 내리막길이니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함께 오기로 했다가 취소한 친구에게 사진 몇 장 보내니 정 힘들면 호수에서 버스를 이용하라는 회신이 온다.
아니 무슨 그런 심한 말을...
종률씨는 내가 얼마나 엄살을 부렸으면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느냐고 정색을 한다.
내 성격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잠깐 포장도로가 나오기에 계속 이러면 재미없겠다 싶었는데 금세 갈림길이 나온다.
나중에는 만나겠지만 왼편은 능선을 타고 가는 길이고 오른편은 계곡길인 모양이다.
이제 편하게 가자 싶어 계곡길로 접어든다.
여기에도 돌멩이가 많다.
호명산이 돌이 많은 산이구나.
비교적 넓은 길을 따라 룰루랄라 가볍게 걷는다.
길을 따라 내려가니 들려오는 물소리.
세수를 하고, 탁족을 할 날씨는 아니지만 산에서 나는 물소리는 얼마나 반가운가.
숲속에 숨어 조용조용 흐르던 물이 참지 못 하고 불쑥 터져나온 것처럼 곳곳 계곡에서 물살이 폭포처럼 부서진다.
한여름 산행은 아니지만 계곡 물소리는 듣는 이의 긴장을 풀어지게 하지.
계곡 물소리가 마음을 치료하는데에도 좋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물가여서 그런가 들꽃도 꽤 눈에 띈다.
물봉선, 누리장나무, 짚신나물...
순간적으로 짚신나물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저게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종률씨가 대뜸 "설마 제가 알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요?" 한다.
당연하지.
종률씨가 아는 건 어렸을 적 소꼴을 먹일 때 소가 먹으면 안 되는 것 아니었나? 후후
얼마를 걸었을까?
잡목이 우거진 곳이 끝나고 쭉쭉 뻗은 잣나무 군락지가 나타났다.
조림을 한 곳이겠지만 가평 잣은 유명하지 않은가.
보기만 해도 속이 후련해지는 곳이다.
잣나무 사이로 여과되어 들어오는 햇살은 부드럽기 그지 없고 코와 입을 가능하면 크게 벌려 이 공기를 가슴 가득 머금고 가야 할 것만 같다.
폭우가 세상을 몇 번 들었다 놓은 후의 이곳 공기는 얼마나 달콤한가.
대동강 물을 팔았다는 봉이 김선달은 아니지만 이곳 공기를 팔면 바로 '대박' 아닐까.
이미 깡통에 산소를 담아 파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평평한 지대에 한쪽에 계곡물 좋지, 잣나무 하늘 높이 솟았지, 전철역 가깝지...
천혜의 조건을 갖추어서 그럴까 여기저기 텐트가 보인다.
텐트 옆에서 해먹에 누워 바람을 즐기면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는데 부러워서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지 않을까?
요즘 유행처럼 하는 '힐링'이라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
캠핑을 하는 사람들을 힐끔거리며 걷는다.
누구와 함께 오든 아니면 혼자이든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자신을 만나면 살면서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겠지.
캠핑 열풍이 유행에 그치지 말고 오래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면 살아가면서 저절로 자연을 찾게 되고, 그러면 자연에 反하지 않는 성품을 갖게 되지 않을까.
잣나무 군락이 끝나자 뙤약볕이 기다렸다는 듯 공격해 온다.
하지만 한여름 햇볕과는 그래도 결이 다르지.
비 때문에 내려간 기온이 걷는데에 그다지 땀을 요구하지 않는다.
물론 평지이니 그렇기는 하겠지만.
산길에 놓여 있는 오토바이 한 대를 보면서 누가 여기까지 짜장면을 배달시켰나 실없는 소리를 한다.
우리나라는 웬만한 곳이면 원하는 걸 모두 배달시킬 수 있는 나라라고 하지 않던가,
그 말을 들은 종률씨는 그런 용도로 쓰기에 오토바이 값이 너무 비쌀 것 같다고 응수를 한다.
산길이 끝나가는 곳이기는 하지만 산길에 서 있는 오토바이가 생뚱맞아 보인다.
바로 앞에 커다란 목조건물이 보인다.
'절집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하며 다가가니 아직 완성이 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상천루'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근처에 상천역이 있으니 가평군에서 조성하고 있는 곳이겠지.
벌써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 단풍나무와 자잘한 열매를 매단 산사나무 사이로 가을이 익숙한 발자국을 떼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마을로 접어들었다.
골목길을 따라 상천역 방향으로 가는데 바닥에 떨어진 열매가 보인다.
이게 뭐지?
낯선 열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목련 열매였다.
목련나무는 주변에 많은데 이런 열매를 매단 것은 처음이네.
목련도 암, 수 나무가 따로 있었나?
'주모마음대로'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주점 광고판을 지나 오후 3시 40분 상천역에 도착했다.
11km를 걷는데 대략 5시간 남짓 걸린다는데 부지런히 발을 놀려 4시간 25분 걸린 셈이다.
오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상천역은 깔끔하게 단장을 하고 느지막한 오후를 맞고 있었다.
잠시 역사에서 쉬다가 청평역으로 가는 열차에 타기 위해 플랫폼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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