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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을 걷다 (21코스 - 경북 영덕)

솔뫼들 2015. 2. 21.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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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마트폰을 이용해 대충 친구가 추천해준 음식점 위치를 확인하고 걷는다.

세찬 바람 때문인지 항구에 묶인 배들만 보이고 오가는 사람은 드물다.

수협 근처 식당을 찾으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을 닫았다.

하는 수 없이 근처에 있는 다른 식당으로 들어가 물회를 시켰다.

고문님은 얼음이 들어간 것으로, 나는 얼음을 뺀 것으로.

한겨울에 물회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데 얼음을 빼고 먹으니 먹을 만하다.

 

 

 

 가자미는 양식이 안 된다고 한다.

대게도 유명하지만 주변에서 가자미가 잘 잡히는지 가자미 물회가 이 지역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모양이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침부터 산길을 오르내리느라 고생한 발을 잠시 쉬게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갈 길을 안내지도에서 확인하는데

옆자리의 손님들이 우리에게 블루로드를 걷느냐고 묻고는

우리가 걸을 블루로드 B코스가 가장 멋진 길이라고 자랑삼아 이야기한다.

블루로드 B코스는 '푸른 대게의 길'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그러니까 더욱 기대가 되는구만.

 

 다시 배낭을 멘다.

길을 따라 걷는데 집집마다 앙증맞은 문패가 달려 있다.

처음에는 한 집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가는데 보니 집집마다 같은 모양의 문패가 붙어 있었다.

아마도 지자체에서 단체로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의 이름만 씌인 집도 있고 부부의 이름이 하트를 중심으로 나란히 붙은 집도 있다.

대부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일텐데 빨간 하트로 묶일 때 기분이 어땠을까?

망측하다고 민망해 하셨을까 아니면 좋아라 하셨을까?

보는 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풍경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죽도산 전망대 오르는 길이 나온다.

죽도산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대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겠지.

죽도산이라는 이름답게 오르는 길 양 옆으로 내 키를 넘는 대나무가 도열해 있다.

죽도산 정상에는 하얀 전망 등대,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단다.

물론 꼭대기에 올라가지 않아도 축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항구 안쪽으로 산자락에 기대어 생각보다 많은 집들이 모여 있다.

그러고 보면 영덕은 높지는 않아도 산들이 꽤 많은 편이다.

 

 

 

 죽도산 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계단길에 한눈에 들어오는 녹색의 다리가 산뜻하다.

서둘러 내려가려다가 계단에서 자칫 구를 뻔 했다.

아이고, 황천길이 먼 곳이 아니라니까.

지난 밤 숙면을 취하지 못 해서 그런지 자꾸 발에 무엇이 걸리고 발걸음이 휘청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축산천 위에 놓인 블루로드 다리는 최근 놓인 현수교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인도이다.

밤에는 조명을 환하게 밝힌다니 죽도산 전망대와 함께 축산항의 명물로 자리잡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사람을 피해 사진을 찍고 조금 출렁이는 느낌이 나는 길로 나도 들어섰다.

 

 

 

 길은 모래사장으로 이어진다.

발바닥은 편한지 몰라도 다리는 푹푹 빠지는 모래 때문에 힘이 드는 길이다.

다행히 바로 해안을 따라 만들어진 데크가 이어진다.

갯바위들이 이어져 있는 바닷가를 따라 걷기 좋은 데크가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갯바위들이 파도를 맞아 허옇게 거품을 문 것처럼 얼어붙은 모습이 장관을 연출해 입을 다물지 못 하게 한다.

장갑을 벗고 사진을 찍기도 힘들 만큼 바람이 세차지만 어쩔 수 없이 손을 호호 불면서 사진을 찍어댄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장면을 머리 속에 담으면서.

 

 

 

 데크를 오르락내리락 하던 길은 다시 솔숲으로 이어진다.

그러더니만 경정리라는 마을로 들어섰다.

경정리가 바로 대게원조마을이란다.

죽도산이 보이는 이곳 게의 다리가 대나무를 닮았다 하여 예부터 대게라 불렸고, 이곳이 영덕 대게 원조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정표를 따라가자 대게원조마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서 있는데 그 아래 돌로 대게 모형까지 만들어 놓았다.

다 비슷한 모양의 조형물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던 울진과는 색다른 것이 인상적이다.

 

 

 잠시 도로를 따라가던 길은 다시 해안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길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근처에 있는 주민에게 물으니 모랫길을 따라 가야 한단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이 길을 따라 걷는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길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주민이 가리키는 길로 들어섰다.

한 발자국 딛을 때마다 발을 옮기기 힘들어하면서 겨우겨우 걷는다.

걸으면서 옆을 보니 모래가 쓸려내려가면서 지반이 공중에 뜬 것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다.

여기도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자연 훼손이 심각한 모양이군.

 

 

 

 어지러운 발자국 사이에 내 발자국을 보태면서 걷는다.

내일 아침이면 사라지겠지만 모래사장에 찍힌 내 발자국을 보며 내 삶이 이 발자국처럼 어지러운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한다.

방향도 왔다갔다 하고 깊이도 제각각이고...

하나만 보고 앞을 향해 걷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공연한 생각에 매어 발자국이 더 휘청인다.

 

 

고요한 물 위에 발자국이 찍혀 일렁거린다

새가 날지 않고 저 저수지의 수면을 밟고 간 흔적

그 새는 수면을 더듬으며 허기 달랠 먹이를 구했을 것

그 사이에 사람 발자국이 찍혀 있다

간밤에 누가 저 수면에서 서성거렸다는 증거,

그 발자국 미세한 빛을 품고 있는 걸 보니

세상에 대해 그래도 미련이 남은 채

물속으로 사라진 사람의 것인 듯

저수지가 거센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 건

다 저렇게 제 위를 건너가거나 제 속으로 들어온 것들을

애틋하게 보듬고 있는 까닭인 거지, 중얼거리며

나도 발자국 찍어보려는 순간

물 위에 찍혔던 발자국들이 이내 사라지고

내 앞에 보이는 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한 마리 검은 짐승이었다

 

             김충규의 <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전문

 

 

 烏梅香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된 마을길로 들어섰다가 길은 다시 해안길로 안내한다.

해안길은 역시 잘 만들어진 데크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한다.

정말 영덕군에서 공을 많이 들였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된다.

 

 

 

 걷는 길 옆으로는 간간이 초소가 나온다.

앞쪽에도 초소가 보이는데 군인이 손을 번쩍 들고 환영인사를 하고 있다.

나도 덩달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 손을 들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군인 조각상이었다.

깜빡 속았네.

블루로드를 걷는 사람들에게 군인의 딱딱함을 탈피해 친근감을 주기 위해 설치했다는데 정말 반가운 느낌이 든다.

거수 경례로 답을 해주고 푸하하 웃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초소는 겨울옷을 입었다.

파도가 얼마나 센지 온통 하얗게 파도를 뒤집어쓰고 얼어붙은 모습이 눈사람 같기도 하다.

데크 옆에 매어놓은 난간 줄에도 주렁주렁 고드름이 달렸다.

바닷가에 겨울이 꽃핀 모습이 내 넋을 빼앗아간다.

이런 풍경은 정말 처음인걸.

심할 때는 파도가 데크로 만든 길까지 넘어오는 모양이니 나도 파도를 맞고 이곳에서 밤을 보내면 저 초소나 바위처럼 되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