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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솔뫼들 2021. 1. 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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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퓰리처상 수상 작품전에 갔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전쟁 상황에서 약자인 여자들이 입는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쓴 작품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며 이 책을 구입했다.

일제감정기에 겪은 위안부 피해자들처럼 말이다.

 

 책의 내용은 내가 예상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저자는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인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 참여한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 소련 여성들을 인터뷰해 기록한 것이었다.

벨라루스는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소련 연방에 속했으니 주변에 그런 여성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의사, 간호사, 저격수, 통신병, 종군기자, 빨치산 병사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들이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한다.

강제로 동원된 경우도 있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나 전쟁이 끝난 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감추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 죽음이 다가오면서 전쟁의 상처를 어딘가에 풀어놓고 싶지 않았을까.

 

 어찌 되었든 전쟁에 참여했다 살아 남은 여성들이 사는 동안 겪는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그리고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을 터인데 읽는 동안 그 생생함에 몸소리가 처졌다.

얼마나 모진 세월이었을까?

똑같은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여성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이 훨씬 큰 것 같다.

 

 이 지구상에 수천 번의 전쟁이 있었다고 하던가.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크고 작은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전쟁에서 설혹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 상처는 크다.

종교는 늘 사랑과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전쟁은 그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이 답답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한반도가 둘로 나뉘어져 적대시하고 있으니 남의 일이 아니지 않은가.

진전되지 않는 평화는 어디에서 찾을지....

 

전쟁이 끝나면 하고 싶은 일이 세 가지가 있었어. 첫째, 배로 기지 않고 두 다리로 서서 전차 타기. 둘째, 흰 빵을 사서 통째로 먹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침대보 위에서 실컷 자기. 하얀 침대보가 깔린 침대 위에서.....

 

 전쟁터에서는 뭔가 하나 정도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붙잡을 필요가 있어. 그래, 뭔가 하나쯤은..... 아직 자신이 사람다울 때, 그 사람다웠던 모습 중 하나는 기억해 둬야 해...... 나는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한낱 회계원에 지나지 않지만 그건 알아.

 

 전투가 끝나고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할 때가 자주 있었어...... 죽과 국을 한 솥 가득 끓여 놓았지만 먹을 사람이 없었지.....

 

우리 가족은 화목해. 사이좋게 잘 지내지. 아이들, 손자손녀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전쟁터야. 늘 그곳에 있어......

 

 이후에도 나는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이 두 진실과 적잖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의식 저 밑으로 쫓아버린 사실 그대로의 진실과 시간의 흔적이 스며든 공통의 진실. 신문 냄새가 폴폴 나는 공통의 진실. 첫번째 진실은 두번째 진실의 맹렬한 공격 앞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우리는 전쟁을 잊고 말고 할 능력이 안 돼요. 우리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 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 이해할수가 없었어..... 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모두 집을 그리워하면서도 돌아가기를 두려워했어.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으니까.....

 

 나는 언제나 우리 축일이 오기를 기다려. 전승기념일...... 그날이 기다려지면서도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지. 그래서 일부러 빨래할 게 많아지라고 몇 주 치 빨랫감을 모아뒀다가 하루종일 빨래만 해. 뭐라도 할 일이 있어야만 하니까. 하루종일 뭐라도 신경쓸 일이 있어야만 하니까.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 '아, 끝까지 살아남기만 한다면......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해 할까! 아,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펼쳐질까!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철석같이 믿었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는...... 도저히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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