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제주도 둘째날 - 서귀포 치유의 숲

솔뫼들 2020. 10. 10.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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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 6시에 눈을 비비고 일어납니다.

피로가 쌓여 숙면을 취할 것 같았는데 호텔 주점에서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방해하는 바람에 잠을 잤나 싶을 만큼

몸이 찌뿌둥합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지요.

 

 오늘은 서귀포 치유의 숲에 가기로 했습니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바로 치유의 숲과 가파도거든요.

치유의 숲은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젯밤 예약 시도를 하다가 잘 안 되어 포기했습니다.

토요일이지만 한번 입장 인원이 30명인데 09시 출발 인원이 7명 예약되어 있어서 

현장 예약도 가능하겠다 싶었습니다.

 

 부지런히 호텔 조식을 먹고 서귀포 치유의 숲으로 출발을 합니다.

시간이 일러 그런지 아니면 토요일이어서인지 생각보다 도로에 차가 많지 않더군요.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면서 중산간으로 향합니다.

앞으로도 이 길을 여러 번 오가겠지요.

 

 오전 8시 40분경 치유의 숲에 도착했습니다.

본인이 예약을 해야 한다기에 스마트폰으로 예약을 하고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안내지도에서 찾아 봅니다.

갖가지 이름을 가진 길이 있는데 숲길이 무려 15km에 달한다고 하네요.

시오름까지 다녀오려면 3시간 정도는 걸리겠군요.

 

 갈 때는 일단 가멍 숲길로 들어섰습니다.

초입부터 원시의 숲이 그대로 느껴지는군요.

코를 킁킁거리며 걷습니다.

약간 곰팡이가 낀 것 같은 냄새가 나는 것도 같습니다.

버섯과 이끼에서 나는 냄새일까요?

 

숲을 보았는가?
천년의 원시림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그 웅장한 거목들의 몸짓을 보았는가?
그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으면
서울 근교 광릉의 아름드리 잣나무밭쯤에
가 보아도 좋네.

그 나무들 곁에 가 고개를 들면
우리가 시정에서 서로 키를 겨루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노릇인가를 보게 되지.

그 나무들 곁에 가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주고받는 일상의 말들이
얼마나 시끄럽고 쓸모 없는 소리인가를 듣게 되지.

아니, 그 나무들 곁에 가 서게 되면
우리가 그 동안 걸었던 먼 길이
얼마나 고달프고 덧없는 짓이었던가를 알게 되지.

저 건장한 어깨와 어깨들을 서로 나란히 엮어
자라는 저 순금의 단란
그들이 지닌 유일한 언어……
저 긍정의 푸른 모음들
그리고 그들의 싹을 틔운 어머니 대지를
한 치도 배반하지 않는
저 충직과 인내.

숲을 보았는가?
몇 백년 묵은 아름드리 거목들이 서 있는
그런 숲에 가 보게
그 숲에 가서 한 둬 시간 머물다 보면
우리는 한 십년쯤 더 자라서
빈 가슴으로 돌아오게 되지.

    임보의 < 숲 > 전문

 

 호젓하게 걷고 싶었는데 뒤에 오는 사람들이 좀 시끄럽군요.

어떻게 피해 가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다행히 그들이 가베또롱 치유숲길로 갑니다.

'가베또롱'은 제주도 사투리로 '가벼운, 또는 가뿐한 '이라는 뜻이라지요.

발음을 하면서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재미있는 말입니다.

 

 얼마쯤 걸었을까 싶은데 빽빽한 삼나무 숲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살짝 하늘이 나무들 틈새로 보입니다.

그래도 서로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하지요.

그런 현상을 두고 'crown shyness'라 한답니다.

좁은 공간에 심어진 나무들이 자라면서 서로의 가지들이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자연현상을 말합니다.

참으로 지혜롭지요.

 

 가다가 잠시 누워 쉬라고 만들어놓은 의자에 누워 봅니다.

인체 곡선을 생각해 만들어서인지 참으로 편안합니다.

다만 오래 있으려니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아니면 이슬 때문인지 등이 축축해져 옵니다.

 

 다시 길로 나섭니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나무에 붙은 이끼 모양도 다채롭고, 나무끼리 엉겨붙은 모양도 기묘합니다.

정말 살아 있는 숲이지요.

 

 이런 숲에서는 천천히 걸어야 치유가 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걸음이 빨라진다고 했더니만 친구 왈,

빨리 걸으면 치유도 빨리 되는 것 아닐까?

친구는 가끔 이렇게 싱거운 소리를 해서 실소를 머금게 합니다.

 

 가멍 숲길을 잘 따라왔다 싶은데 엉뚱한 길로 들어섰나 봅니다.

이정표 삼아 있는 안내판을 보아도 도무지 방향을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오고생이 치유숲길로 들어섰다가 벤조롱이 치유숲길로 바꾸어 걷습니다.

'오고생이'는 '있는 그대로', ''벤조롱이'는 '산뜻한, 멋진'이라는 제주 말이랍니다.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하늘이 순간 개었습니다.

파란 하늘이 보이네요.

어제도 흐려서인지 파란 하늘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나무 사이로 햇살 내려앉는 소리를 듣습니다.

고요 속에 그만 나를 툭 내려놓은 기분이군요.

 

 겹겹이 세월을 껴입은 나무 사이에서 갑자기 제가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인간은 이런 숲에 있으면 거의 미물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나무 한 그루, 풀 하나도 모두 존재감을 드러낸 숲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가만히 숲의 소리를 듣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이제 오르막길이 이어지네요.

시오름까지 가는 하늘바라기 치유숲길입니다.

시오름에 오르면 사방이 뻥 뚫려 전망이 좋다지요.

그런 기대를 안고 헉헉대면서 계단길을 오릅니다.

   

 고지가 바로 저기네요.

그런데 안개가 또 훼방을 놓는군요.

안개가 시야 중간을 그만 뿌옇게 칠해 놓았습니다.

조금 전에 파란 하늘을 선사하더니만...

정말 제주 날씨는 시시각각 변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운이지요.

 

 연세 드신 분들이 시오름 정상에서 쉬면서 간식을 들고 계십니다.

정상 못 미처 의자가 있기에 우리도 잠시 쉬어가기로 합니다.

계속 오르막길을 걷다 보니 등은 땀에 푹 젖었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한숨 돌립니다.

 

 내려갈 때는 시오름 너머 반대편 길을 선택합니다.

급경사 길이 한동안 이어집니다.

놀멍 치유숲길을 걷다가 산도록 치유숲길로 갈아탔습니다.

'산도록'은 또 '시원한'이라는 제주어라고 하지요.

 

 혼자 올라오는 사람들이 꽤 보입니다.

이 깊은 숲길을 혼자 걷는 사람은 매우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 음악을 크게 틀고 오는군요.

이런 숲에서도 인간이 만든 음악을 크게 들어야 할까요?

잠깐이라도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일까요?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걷다 보니 중간에 물이 고인 곳이 있네요.

하기는 나무가 있는 곳은 당연히 물이 있겠지요.

이런 곳에 있으면 숲의 정령이 살그머니 말을 걸어올 것 같지 않은가요?

태곳적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한 원시림 풍경 앞에 잠시 발이 멈춥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나무로 만든 건물이 보입니다.

여기가 치유의 숲 힐링센터입니다.

얼마 전부터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힐링'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가 남용되는 것이 싫습니다.

우리 삶이 훨씬 복잡해지고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치유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쩌면 정신적으로 나약해져서 그런 단어를 쓰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건물에서는 다양한 치유활동이 이루어지나 봅니다.

귀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쉴 수도 있고,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며 침묵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이런 곳에서 잡념 없이 하루쯤 묵고 자연과 하나 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싶습니다.

 

 이곳까지 산책 삼아 오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쉴 만한 공간이 많군요,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도 나누고, 하늘도 보고, 낮잠도 즐기고...

 

 근처에 치유샘이 있다기에 찾아보려 했는데 잘 보이지 않네요.

이렇게 깊은 숲에 샘이 있으면 산꾼들은 으레 '산삼 썩은 물'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보약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숲을 걸은 것만도 이미 보약을 먹은 셈이지만 거기에 숲에서 나오는 물 한 모금 마시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욕심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엄부랑 치유숲길로 들어섭니다.

'엄부랑'은 '엄청난, 큰'이라는 뜻이랍니다.

이제 길이 편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기 역시 꺾인 나무가 밟히고, 돌부리가 발길을 가로막고, 때로는 이끼가 미끄러운 숲길이군요.

이런 길에 물기가 있으면 긴장을 풀 수가 없지요.

 

 정말 숲길을 벗어나 이제 대로인 가멍오명 숲길로 들어섭니다.

치유의 숲 안내도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길이지요.

이런 길에서는 마음 편히 걸어도 됩니다.

처음 트레킹을 시작할 때에는 가멍 숲길로 올라 내려올 때 오멍 숲길을 이용하자 했는데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네요.

 

 룰루랄라 걷다 보니 방문자 센터에 도착했습니다.

2시간 50분 걸렸네요.

시오름까지 3시간 예상했는데 조금 빨리 내려왔습니다.

치유의 숲을 걷는 시간은 온 몸으로 숲을 온전히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오고 싶은 숲길입니다.

이런 숲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