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오늘의 시 - 백목련 진다

솔뫼들 2019. 4. 2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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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목련 진다

                                  김선우


     이상하다, 계곡을 몰아쳐오는 눈보라

     저 눈꽃떼를 어디서 만났던다

     꽃으로 오기 전

     네가 눈보라였다면 나는 무엇이었나

     청명한 봄 한나절

     돌연 단전 밑이 서늘해지고

     내장을 따라 들어선 계곡에

     꽃, 잎새도 없이 만개한 적멸보궁


     얼음 녹아 아지랑이 흐르는데

     왜 너는 그토록 서늘한 미소로 흔들리는지

     네가 웃는 자리마다 조금씩 금이 가며

     계곡의 뿌리가 시큰하다


     독은 독으로 멸한다는데

     동토를 녹인 건 열망의 독이었나

     거꾸로 흐르는 눈보라의 꿈


     사월 아침마다

     목련꽃 져버릴까 두려웠더니

     제 살 으깨며 번지는 석양 아래

     눈보라여, 너는 자결을 준비했구나

     뒤란에 나부끼던 무령 타래같이

     새벽부터 곱게 몸단장 끝냈구나


     꽃으로 오기 전 너는 무엇이었나

     거꾸로 선 폭포였나 진흙창 뒹굴던 놋반지였나

     내 독은 아직 사타구니 뜨거운 희망이라서

     절망을 멸하러 오는 절망의

     맨얼굴을 볼 수 없다 네 발목을 잡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