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셋째날 - 수월봉 지질트레일
기분좋게 맛난 점심을 먹고 나니 흐뭇하다.
이제 어딘가를 걸으면서 소화를 시켜야 하지 않을까.
주변을 산책하는 동안 찾아본 결과 수월봉이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월봉으로 향한다.
수월봉은 오래 전 어머니 米壽 기념으로 언니네와 제주도 여행을 할 때 한번 와본 곳이다.
수월봉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수월이와 녹고라는 남매가 홀어머니 병구완을 위해 수월봉에 오갈피라는 약재를 캐러 왔다가 누이인 수월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자 녹고는 슬픔을 못 이겨 17일 동안 울었다고 한다.
이 녹고의 눈물이 곧 녹고물이라고 전하며 수월봉을 '녹고물 오름'이라고도 한다.
수월봉은 전망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정상에 서 있는 흰색 천문대가 인상적이고, 바다에는 시원스럽게 풍력발전기가 돌아갔었지.
날이 좋으면 멀리까지 볼 수 있으련만 오늘 그런 전망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고산 천문대 부근 정상까지 가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지질트레일을 걷기 위해 내려간다.
이정표를 보고 갔는데 이정표가 잘못 되었는지 우리가 안내지도를 잘못 보았는지 엉뚱한 곳을 헤매다가 다시 올라와서 지도를 확인하고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지질공원이란 지구과학적으로 중요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장소로서 자연, 인문, 사회, 역사, 문화와 전통 등이 결합되어 있으며 지역 주민의 경제적 이익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공원을 말한다고 되어 있다.
제주도는 2010년 유네스코 지질공원으로 인증이 되었다고 하네.
한라산, 수월봉, 만장굴, 산방산, 거문오름, 선흘 곶자왈, 우도, 비양도 등이 대표적인 지질공원이고.
이곳 수월봉은 약 1만8천년 전 수성화산분출로 형성된 응회환의 일부로 세계적인 화산학 연구의 교과서로 잘 알려진 곳이란다.
특이한 모양으로 켜켜이 쌓인 절벽을 구경하면서 해안길을 걷는다.
전에는 이곳까지 오지 않고 수월봉만 돌아보고 갔었지.
정말 희한하다 싶을 만큼 마그마가 폭발하면서 만들어낸 절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불구불 파도 모양으로 요동을 치는 사이에 돌들이 박혀 있는 모습이라니...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에 새삼스레 감탄하게 된다.
가다 보니 일제강점기 진지도 나온다.
제주도 곳곳에 이런 진지를 만들었구나.
어제 걸은 동백길에서도 그렇고, 가는 곳마다 일본군 진지가 있어서 몸서리를 치게 된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도 있는데 전설 속에서 누이를 애타게 부르며 우는 '녹고의 눈물'이라고 되어 있다.
현실은 냉정한데 전설은 항상 아름답지.
아직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해국이 배시시 웃고 있다.
반갑게도 겨울을 잘 이겨냈네.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걷다 보니 바로 코 앞에 섬이 보인다.
저 섬 이름이 뭘까?
가까이 가니 차귀도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지금은 무인도라고 하는군.
차귀도라는 이름에도 전설이 전해져 온다.
옛날 중국 호종단이 제주에서 중국에 대항할 큰 인물이 나타날 것을 경계하여 제주의 지맥과 수맥을 끊고 중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한라산의 수호신이 매로 변하여 갑자기 폭풍을 일으켜 배를 침몰시켰다.
배가 돌아가는 것을 차단했다고 해서 이름이 '遮歸島'가 되었다고 한다.
차귀도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곳에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세워 놓고 대기하고 있다.
아하! 여기가 사진 명소로구나.
일몰 광경이 빼어나다고 하더니만 이렇게 사진가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제주에서 일출 하면 성산봉이고, 일몰 하면 수월봉이라고 하던가.
일몰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차귀도와 거기 어우러진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빚어내는 풍광이 가히 절경이다.
섬들이 이어 있는 모습이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 같기도 하네.
나도 모르게 자꾸 방향을 바꾸어 사진을 찍게 만든다.
지질트레일 지도를 보면 당산봉을 한 바퀴 돌게 되어 있는데 길을 못 찾겠다.
하는 수 없이 마을만 한 바퀴 돌고 발길을 돌리는데 소박하고 예쁜 민박들이 눈에 들어온다.
민박 툇마루에 걸터앉아 해가 지는 걸 바라보면 더할 나위 없겠군.
행복이 바로 그런 것 아닐까.
해변가 민박 담벼락에 쓰인 문구가 그렇게 말해 준다.
돌아가는 길에 보니 차귀도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이 있었다.
친구는 유람선을 타고 차귀도를 돌아보고 싶단다.
그런데 유람선 매표소에는 사람이 안 보인다.
비수기 평일이라 운행을 안 하는지도 모르지.
걷다가 쉴 겸 잠깐 바닷가에 앉아서 보니 바위에 뿌리를 내린 식물들이 꽤 보인다.
염생식물이겠지.
쉬운 삶이 어디 있겠는가만 그래도 파도에 시달리는 둥 살아가기에 쉽지 않아 보인다.
친구 왈, 쟤네는 짠 물을 먹어서 다 고혈압에 걸렸을 거란다.
실없는 소리를 들으며 키득대고 웃는다.
오후 4시가 가까워졌다.
오늘 일정을 마치고 이제 호텔로 돌아가자.
점심을 워낙 든든하게 먹어서 그런지 아직도 소화가 안 된다.
저녁은 간단히 먹어야겠네.
친구와 해녀김밥을 사서 방에서 먹는 건 어떠냐고 했다.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해녀김밥에 전화를 하니 받는 사람이 없다.
저녁에 문을 닫는다고 되어 있던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끊고 나자 바로 문자 오는 소리가 들린다.
식재료가 소진되어 가게 문을 닫았다는 내용이다.
딱새우, 전복, 오징어 등 해산물을 넣고 김밥을 만든다고 하더니 오늘치 신선한 해산물이 다 떨어진 모양이다.
가게 이름이 해녀 김밥인 이유이겠지.
이번에는 그제 못간 해물짬뽕집에 전화를 해 본다.
오늘이 쉬는 날로 되어 있기는 한데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오늘은 가게가 휴무라고 하면서 그제도 갔었다고 하니 식재료가 떨어지면 시간과 상관없이 문을 닫는단다.
제주에서 싱싱한 해산물로 음식을 만드는 맛집은 대부분 그렇구나.
'재미제주'도 그랬지만 식재료가 소진되어 가게 문을 일찍 닫는 김밥집이나 해물짬뽕집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진다.
일단 메뉴는 해물짬뽕.
호텔에 잠시 들렀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무언가 허전한지 친구가 1층 카페에 가자고 한다.
참새 방앗간처럼 오며가며 자주 들르게 되는군.
빵을 두 개 사 가지고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오늘은 다행히 비는 피했지만 바람이 좀 거세기는 했지.
내일은 무엇을 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