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둥산에서 (1)
K형!
오랜만에 산에 가기로 했습니다.
노르웨이 피오르 트레킹 다녀온 후 본격적인 산행은 처음입니다.
바야흐로 가을이니 가을 느낌 물씬 나는 산에 가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가을 하면 억새가 떠오르지요.
한때 가을의 전령사 하면 코스모스나 국화를 떠올렸는데 언제부터인가 억새가 가을의 왕좌를 차지한 느낌입니다.
억새로 유명한 산을 떠올리니 명성산이나 오서산, 아니면 멀리 영남알프스나 천관산도 있지만 가장 먼저 민둥산이 떠오르네요.
민둥산은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된 경우이지요.
강원도 정선에 있는 민둥산은 해발 1,119m로 그리 낮은 산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상 부근에 나무는 거의 없고 억새만 우거져 특별한 풍경을 선사합니다.
억새가 많은 것은 산나물이 많이 나게 하려고 매년 한번씩 불을 질렀기 때문이라지요.
어찌 되었든 억새 덕분에 민둥산은 가을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정선은 억새 축제를 펼치게 되었습니다.
10년도 훨씬 전에 민둥산에 서너 번 갔었습니다.
열차를 타고 가기도 했고, 버스를 이용하기도 했지요.
가을 소풍처럼 여겨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는 안내산악회를 이용해 가기로 했습니다.
새벽 5시 45분에 집을 나섭니다.
10월이 되니 해가 짧아져 집에서 나갈 때는 어둑합니다.
그래도 아직 기온이 많이 내려가지 않아서 다행이지요.
사당역에서 친구를 만나 바로 버스에 오릅니다.
버스에 오른 후에는 가능하면 잠을 이루려고 노력을 합니다.
새벽에 집에서 나오기 위해 긴장을 했는지 지난 밤에 잠을 깊이 못 잤거든요.
버스는 양재역과 신갈을 들러 신나게 달립니다.
휴일인데도 생각보다 고속도로가 밀리지 않는군요.
버스는 잠시 이름도 소박한 '금봉이네 휴게소'에 들렀다가 내처 정선 민둥산 들머리를 향해 갑니다.
오전 9시 50분, 민둥산 산행 들머리인 삼내약수에 도착했습니다.
이 코스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코스군요.
이전과 다른 코스로 오르니 새로워서 좋습니다.
삼내약수에서 민둥산 정상까지는 5.5km 2시간 걸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거리를 볼 때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말이지요.
산행 준비를 하고 오전 10시, 산행을 시작합니다.
어제 비가 왔다더니만 촉촉한 흙길이 발바닥을 간질이는 느낌입니다.
그 느낌을 즐기면서 가는데 친구는 벌써 저만치 가고 있네요.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다니까요.
저도 부지런히 쫓아갑니다.
초반에는 완만한 길이 나오다가 급경사로 바뀌었습니다.
숨이 턱에 닿을 듯합니다.
천천히 계단길을 오릅니다.
다른 코스와 달리 여기는 돌도 많군요.
혹시나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조심합니다.
노르웨이 쉐락 볼튼에서 넘어진 뒤로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아직도 발목에 약간 불편한 증상이 남아 있거든요.
길 옆에 간혹 보이는 단풍 빛깔이 그리 곱지 않네요.
단풍이 안 들고 아예 잎사귀를 떨군 나무도 보입니다.
올 여름 지독히도 무더웠던 날씨 때문이겠지요.
사람뿐 아니라 생명이 있는 모든 게 힘들었을 겁니다.
간간이 산부추 보랏빛 꽃이 보입니다.
헉헉거리며 걷다가 잠깐 들꽃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잠깐이지만 힘든 걸 잊게 됩니다.
앞만 보고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요.
가파른 길을 어느 정도 오르자 다시 능선길이 나타납니다.
편안한 길이군요.
이정표가 친절하지는 않지만 좁게 난 오솔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혹시나 길이 헷갈릴 때 같은 버스에서 내린 사람이 있으면 서로 길을 묻기도 하고 안심이 되지요.
젊은 친구들이 앞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길을 찾아가기에 마음 편히 따라갑니다.
우리는 귀찮아서 어쩔 수 없을 때만 스마트폰을 이용하는데 역시 젊음이 좋기는 하네요.
젊은 친구들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갈림길에서 직진을 해야 하는데 실수를 했나 봅니다.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사유지 농장으로 보이는 길로 접어들었다가 다시 임도를 따라갑니다.
이제사 이정표가 제대로 나오는군요.
낙엽송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청명합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파란 가을 하늘이 반갑습니다.
아직 한낮 기온이 많이 오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날씨가 감사할 뿐이지요.
환영 인사라도 하듯 둥그러니 고개 숙인 나무 아래로 가을을 즐기며 걷는 길입니다.
룰루랄라 걷다 보니 이정표가 우회전을 하라고 일러 줍니다.
아하! 여기에서부터 억새밭이 펼쳐지는군요.
가운데 계단길을 두고 도열한 억새 사이에서 저는 가을 여인이 됩니다.
일부러 천천히 걷고 싶은 길입니다.
친구와 번갈아 사진을 찍어주고 억새 사진도 찍으면서 걸어갑니다.
계단길을 다 오르자 정말 장관이 펼쳐집니다.
말 그대로 사방이 은빛 물결로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곳을 찾아 발걸음을 한 것이지요.
민둥산은 가을이면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곳인데 아직 억새 절정기가 아니라 그런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억새에 푸른 기운이 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호젓하게 즐기기에는 훨씬 좋습니다.
정상이 저 위에 보입니다.
어느 쪽으로 한 바퀴 돌까 하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올라올 때보다는 사람이 늘었군요.
증산초교에서 올라온 사람들인가 봅니다.
우리가 온 삼내약수보다는 거리가 훨씬 가깝지요.
가는 길 양 옆이 온통 억새밭입니다.
이제는 전에 없던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서 억새밭을 보호하고 있군요.
10여년 전에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억새밭에 들어가는 바람에 억새가 짓이겨지고, 곳곳에 굴처럼 파였던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