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셋째날 (4) - 산굼부리
여유를 부리고 쉬었으니 이제 다시 길로 나선다.
다음 목적지는 산굼부리이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처음 제주도 여행을 왔던 서른살 무렵 산굼부리를 왔던 것 같다.
대학시절부터 꼬박꼬박 메모를 해 놓으니 그 당시 수첩을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기억이 안 난다.
고장난 기억을 고칠 수 없으니 다시 방문해서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야지.
오후 2시 40분, 산굼부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여기는 선물처럼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어서 딴 세상에 온 느낌이 든다.
눈구경 실컷 할 수 있겠군.
지난 밤에 네이버에서 예약을 해 할인을 받고 英鳳門으로 입장을 했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은데 눈 때문에 길이 막힌 곳이 있군.
그럴 때 장난끼가 발동된다.
다른 사람들이 안 가는 곳을 가 보기로 한다.
눈 때문에 길이 안 난 곳인데 억새가 엄청나게 많은 곳이다.
산굼부리는 많은 사람들이 억새로 유명한 곳이라고 기억한단다.
물론 억새가 많지만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문화재인데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굼부리'는 분화구라는 말이다.
다랑쉬오름에 있던 분화구도 굼부리이다.
그런데 산굼부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평지에 있는 분화구라고 한다.
또한 산굼부리는 특별한 생태학적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한라산과도 동떨어져 있는 상태로 오래 되어 식물 분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변산바람꽃, 고란초, 눈괴불주머니 등 희귀한 식물이 많고, 450여 종이나 되는 식물이 자란다고 하니 가히 식물원 수준 아닌가.
지질학적으로도 진기한 형태라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는데
산굼부리가 한라산 백록담보다 넓고 깊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진다.
억새가 많은 곳으로 발길을 하니 눈이 무릎까지 올라온다.
몇 사람이 자나갔는지 그나마 발자국이 있어 그대로 따라가는데도 한 발 옮길 때마다 힘이 든다.
잘 먹었다고 힘 좀 쓰라고 하는군.
동심으로 돌아가 눈 장난을 해 본다.
최근에 눈이 쌓인 곳을 지나갈 때마다 눈사람이 보이는데 다 개성이 있었다.
눈이 오면 모두 예술가가 된다고나 할까.
눈사람이 모두 어린아이들이 만든 건 아닐테고 어른들도 눈을 보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고...
억새길을 한 바퀴 돈다.
눈에 덮인 억새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도 좋다.
어디에서 보았던가.
억새는 세 번 핀다고.
초가을 적빛으로 시작이 되고
가을의 중심에서 은빛으로 빛나다가
겨우내 백색으로 남은 기간을 보낸다.
우리는 백색의 억새, 백색의 눈과 대화를 하면서 걷는다.
곳곳에 영화를 찍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풍경이 멋있어 영화를 찍기에도 좋은 장소이겠지.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할 때 장소 섭외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전국, 아니 전세계를 일 때문에 찾아다녀야 한다던가.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게 일로 연결이 될 때는 즐길 여유가 없을 수도 있겠다.
눈 덕분에 올렸다 내렸다 다리 운동을 원없이 하고 전망대에 도착하니 해설사가 젊은 친구 서너 명을 대상으로 해설을 하고 있었다.
분화구를 내려다보며 잠시 옆에서 해설을 듣는다.
잠깐 귀동냥을 하다가 길어질 것 같아 사진 몇 장 찍고 하늘계단을 내려간다.
푹푹 쌓인 눈 때문에 계단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길이다.
구상나무길을 따라간다.
산굼부리에서 가장 추천하는 길이라고 한다.
구상나무는 사철 푸르기 때문에 산림욕에는 최고란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드는 나무도 구상나무였지.
최근 우리나라 고유종 구상나무가 멸종위기에 처했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사람들의 무관심도 있겠지만 기후가 참으로 많은 걸 변화시킨다.
구상나무길을 따라 끝까지 걸었다.
분화구를 한 바퀴 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길이 막혔다.
실망스럽다.
아쉽지만 여기에도 보호해야 할 것이 많은 모양이라고 하며 발길을 돌린다.
돌아오는 길에 꽃굼부리로 들어선다.
겨울이니 꽃은 없고 눈만 쌓여 있지만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든 즐길 준비를 하고 있지.
사람들이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눈으로 다양한 동물 모양을 만들고, 일행끼리 눈싸움을 하고, 심지어 눈이 쌓인 곳에 눕기도 한다.
귀여운 눈사람, 의젓한 눈사람, 코가 뭉툭한 사자(?), 귀가 쫑긋 선 아기호랑이(?)...
내 눈에 보이는 모습들이다.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 속에
호젓이 세워 놓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유안진의 < 눈사람 > 전문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 구경도 하고, 노는 모습 구경도 하면서 덩달아 젊어지는 느낌이다.
좋을 때지.
둘이 놀기에는 좀 어색해 다른 사람들 구경만 하고는 돌아나온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다른 계절에 오면 분화구에 자생하는 식물 구경도 하고, 꽃굼부리에 무슨 꽃이 피는지 살펴볼 수도 있겠다.
3년 전에 왔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 본다.
아쉬운 마음에 입구를 다시 한번 둘러보는데 중국인 단체 관광객으로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얼른 차에 올라 용눈이오름으로 차를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