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여행기 35 - 칠레 W트레일 '이탈리아노 산장 ' (1)
오전 6시 30분, 트레킹 준비를 위해 눈을 떴는데 전기와 난방, 온수가 제공되지 않는다.
여기 역시 태양열로 전기를 해결하는데 예고 없이 중단이 되는 모양이지.
그래도 산중에서 이 정도는 양호하다고 하면서 랜턴을 꺼낸다.
사실 히말라야에서는 제한 정전은 당연한 것이고, 온수는 꿈도 못 꾸었지.
그에 비하면 이번에는 아주 호사스러운 트레킹 일정이다.
부스럭거리며 트레킹 준비를 하는데 전깃불이 들어왔다.
순간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배낭을 들고 나선다.
오전 8시, 차를 타고 1시간 정도 이동한 후 푸데토 선착장으로 이동한다.
가는 길에 보니 설산을 배경으로 빙하호 한가운데 섬이 있다.
섬으로 연결된 다리를 건너면 아주 예쁜 리조트가 있네.
햐! 이 리조트에서 묵으면 정말 환상적이겠는걸.
설산과 빙하호를 머리맡에 두다니...
아침이면 설산의 표정이 궁금해 저절로 눈이 떠질 것만 같다.

오래 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갔다가 포카라의 페와 호수 안에 있는 피시테일 리조트에서 묵은 기억이 난다.
거기에는 다리가 없어 바지선을 타고 들어갔었지.
네팔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긴다는 마차푸차레 봉우리가 호수에 비친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걸 보고 즐기기 위해 조금 낡은 리조트임에도 각국 정상들이 묵는다고 했다.
리조트 주변 호수를 보트를 타고 한 바퀴 돌아도 좋다는데 비행기 시간에 쫓기는 바람에 아쉬움이 남았던 기억도 나네.
선착장에 도착해 페리호에 오른다.
보트에 자리가 없어서 호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비가 창문에 뿌리친다.
오늘 날씨 심상치 않겠는걸.

페리호에 탄 사람들은 모두 트레커들이다.
이들의 아웃도어 의류와 장비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옷이나 장비로 어느 나라 국민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국적 아웃도어가 모두 출동을 했구만.
그리고 파타고니아에서는 어떤 복장이 좋은지도 짐작이 된다.
내가 너무 가볍게 준비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리호에서 내린 후 잠시 파이네 그란데 산장에 들른다.
간단히 뜨거운 차도 마시고, 간식도 먹고, 화장실도 이용하고...
파이네 그란데 산장은 건물 안에서 묵을 수도 있고, 밖에서 야영을 할 수도 있다.
산장 옆에 울긋불긋 수많은 텐트가 꽃처럼 떠 있다.
텐트를 보자 사람들의 열정이 대단하구나 싶다.
유비무환이라고 준비를 철저하게 했겠지만 그래도 밤에는 몹시 추우리라.
지나고 나면 그 또한 추억이 되겠지만.

본격적으로 트레킹에 나선다.
길은 평탄하다.
좁은 길에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걷는다.
어제보다 오늘 단체 트레커들이 훨씬 많다.
우리 팀이랑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팀도 있고.
오늘 역시 설산을 보며 걷는 길이다.
그런데 계속 구름이 심술을 부리는군.
설산이 보였다 말았다 감질나게 한다.
혹시나 멋진 풍경이 보일까 계속 눈길을 주며 걷는 것도 쉽지 않네.

드디어 후둑후둑 비가 내린다.
어제도 그랬으니 그러려니 싶으면서도 하늘이 좀 야속하다.
오늘은 춥기까지 해서 벙거지 모자를 쓰고 걷는다.
장갑을 꼈는데도 비에 젖어서 손이 곱다.
완전히 겨울 날씨네.
깊은 산중은 늘 그렇지만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앞서가던 안드레가 오늘도 빙하수를 받아 마신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따라서 하는데 나는 손바닥에 받아 마시고 돌아선다.
내려갈 때 받아 가야지.
가는 길에 오른편으로 호수가 보인다.
이 호수 역시 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설산을 배경으로 한 호수 구경을 하면서 잠시 쉰다.

잠시 햇살이 났다.
비가 내렸다 햇살이 쨍, 싸락눈이 내리기도 하고...
고어텍스 의류를 계속 입고 가기에는 덥고, 비가 오면 다시 챙겨 입어야 하고...
옷을 입었다 벗었다 정신이 없다.
정말 변덕스러운 날씨다.
파타고니아 날씨의 진수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오른편에 호수를 끼고 걷는 길이 이어진다.
그런데 나무들이 허옇게 죽어 있다.
2011년에 난 화재 때문이라고 한다.
2011년 12월에 난 화재는 어이없게도 이스라엘 여행객이 볼일을 본 휴지를 태우다 발생했단다.
산불이 70여일간 이어지는 바람에 무려 4900만평에 달하는 면적이 불에 탔다고 하네.
정말 한심한 일이다.
안타까움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남녀 불문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누구나 군대에 가야 한다.
군대에서 제대할 때는 목돈을 손에 쥐게 되는데 그 돈으로 외국 여행을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하네.
그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민폐를 끼친다고 소문이 났단다.
다른 민폐야 그렇다고 쳐도 이런 일은 정말 생태계에 치명적인 일이다.
설산을 배경으로 허연 枯死木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니 묘한 느낌이 든다.
제각각 모양으로 쓰러진 고사목들이 목조각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 나무들뿐이겠는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 죽음을 맞게 되겠지.
'메멘토 모리!'
묵묵히 길을 따라 걷는다.
어제처럼 한번에 두 사람만 건널 수 있다는 다리도 건너고, 엉겅퀴꽃을 보고 사진도 찍는다.
걷다가 고개를 들어 구름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설산 구경도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