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무섬마을을 돌아보고 (2)
K형!
몸을 식혔으니 다시 일어서 볼까요?
일단 마을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끝까지 걸어보기로 합니다.
길 한 켠으로 끝없이 주차된 자동차 행렬이 이어집니다.
여행객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동네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면 훨씬 분위기가 낫지 않을까 싶군요.
매연은 물론이요, 차와 사람이 뒤엉키고, 때로는 좁을 길에서 차를 돌리다가 차주들끼리 다툼도 일어납니다.
보기 좋지 않습니다.
마을을 꽤 벗어날 정도로 걸으니 주차된 차가 보이지 않습니다.
산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려니 밭에서 일하시던 분이 길이 없다고 하시네요.
하는 수 없이 되돌아 마을로 향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아무래도 음식점 주변이 가장 분주합니다.
무섬식당도 있고, 초가 카페도 보이네요.
우리는 이제 본격적으로 마을 탐방에 나섭니다.

해우당 고택?
어디에서 본 것 같다 싶었더니만 어제 선비촌에서 보았군요.
선성 김씨 입향조인 김대의 셋째 손자 김영각이 건립하였고 고종 때에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락풍이 중수한 집이랍니다.
영남지방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이지요.
골목을 따라 오르면 대규모로 醬을 담그는 집도 보입니다.
가지런히 늘어선 장독대가 옆에 있네요.
가을볕을 받는 항아리 안에서 된장이 골콤하게 잘 익어가고 있겠군요.
집에서 장을 담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요즘 맛있는 된장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농담 삼아 좋은 음식 찾아 사 먹는 것도 재주라고 하지요.
우리 어릴 적만 해도 장을 사 먹는다거나 김치를 사 먹는 건 생각도 못 했습니다.
문명이 빠르게 발달하고 남녀 모두 사회생활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면서 조만간 장을 담고 김치를 담가 먹는 사람이 천연기념물처럼 여겨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을을 돌아 보니 대부분 기와집인데 간혹 초가집도 보입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집도 있고 현실과 타협해 살면서 편리하게 고친 집도 보이더군요.
오래된 가옥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시로 손이 갈텐데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마을 뒤 산자락 아래 이르니 정자가 나옵니다.
淸退亭이라 되어 있군요.
과거에 급제하고 병조판소를 지낸 반남박씨 吾軒公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하네요.
정자에 올라가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싶어집니다.
나지막한 지붕들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모여 있습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도 손에 잡힐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대부분의 집이 고택 체험 등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어수선한데 한 가옥에서는 머리에 서리가 내린 어르신이 조용히 곡식을 손질하고 계시네요.
골목을 오가며 떠드는 사람들은 아랑곳없이 말입니다.
세월의 두께가 곱게 내려앉은 어르신 얼굴에는 담담함과 평화로움이 묻어납니다.
발걸음도 조용조용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나갑니다.
골목을 지나다가 눈길이 멎은 곳은 툇마루 아래 가지런히 장작이 쌓인 집입니다.
아직 장작을 때는 아궁이가 남아 있다는 말이겠지요.
대부분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마을에 남아 있는 걸로 아는데 누가 저 장작을 팼을까요?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떠올리니 마음마저 따스해져오는 느낌입니다.

선비 같았던 시인 조지훈의 처가도 무섬마을에 있었군요.
항일운동과 문맹퇴치운동 등을 했던 김성규가 조지훈의 장인이라고 합니다.
신혼 초 조지훈이 이곳에 자주 머물며 남긴 시가 '別離'라는군요.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이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끈질 듯 고운 메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무섬마을 같은 전통마을을 걸을 때는 걸음 속도도 진양조나 중모리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모든 속도를 옛마을의 속도와 맞추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사브작사브작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잠시 조선시대 말 어느 집 아녀자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할 거고요.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강변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외나무다리가 하나 더 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그 다리로 인원이 분산되면 외나무다리 하나에 사람들이 북새통을 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다른 외나무다리를 찾아 나서 봅니다.
강을 따라 걷다 보니 안내판이 보입니다.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니 외나무다리가 부서져 있군요.
일부는 수해가 났을 때 떠내려갔는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건넌 외나무다리는 마을과 가까운 곳에 새로 만든 다리였습니다.
오래된 다리를 정말 조심하면서 살금살금 건너보고 싶었는데 아쉽습니다.

이제 외나무다리를 다시 건너가야 합니다.
물론 수도교로 건너도 되지만 그건 재미가 없지요.
저녁이 가까운 시간임에도 사람들이 외나무다리에 줄을 섰군요.
그 가운데 저도 슬며시 끼어듭니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를 건너서 마을로 들어가기.
다른 어느 곳에서도 맛보기 힘든 풍경이지요.
고택 체험을 포함해 젊은 친구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군요.

무섬마을을 뒤로 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다리가 무겁습니다.
오늘도 참 바쁜 하루였지요.
소백산자락길에서 4시간 꼬박 걸었으니 무섬마을은 쉬엄쉬엄 구경하자 했는데 어디든 다리[脚]가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거였네요.
결국 무섬마을에서도 2시간 가까이 돌아보며 만보쯤 걸었습니다.
신체기관 중 불필요한 곳은 없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중 눈과 다리의 중요성을 실감합니다.
아무리 가고 싶은 곳이 많아도 걷지 못 하면 갈 수가 없고, 가서도 못 보면 또한 갈 필요가 없겠지요.
거기에 이가 안 좋아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면 인생의 樂 하나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어떻게 건강 관리를 해야 하는지 생각이 많아지는 나이가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