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얼마만인가, 禾也山 (4)

솔뫼들 2020. 6. 2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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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禾也山' 한자가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는데 벼가 잘 자라는 동네가 옆에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근처에 물이 많고 땅이 기름지다는 말이겠지.

주변에 산지가 많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논농사를 위주로 한 우리나라 사람들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 아닐까.

물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을 한다.

 

 길이 거의 평평해졌다.

룰루랄라 긴장을 풀고 걸어도 되는 길이다.

계곡을 건넜다.

근래 비가 자주 와서인지 계곡 水量이 풍부하다.

 

길이 구부러졌나 싶자 또 계곡을 건넌다.

조심해야겠구만.

장난을 친 것도 아닌데 계곡을 건너다가 등산화에 살짝 물이 들어갔다.

오늘 몇 번이나 계곡을 건너는지 세어보아야겠다.

 

한참 내려왔다 싶어 일행들에게 계곡에 발을 담그고 피로를 풀고 가자고 제안을 했다.

물소리로 귀를 씻고, 녹음으로 눈을 씻고, 계곡물로 발을 씻고...

여름 산에 이만한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풀잎은 풀잎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초록의 서정시를 쓰는 5월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피곤하고 산문적인 일상의 짐을 벗고

당신의 샘가에서 눈을 씻게 하십시오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네 가슴속에 퍼 올리게 하십시오

말을 아낀 지혜 속에 접어 둔 기도가

한 송이 장미로 피어나는 5월

호수에 담긴 달처럼 고요히 앉아

불신했던 날들을 뉘우치게 하십시오

은총을 향해 깨어 있는 지고한 믿음과

어머니의 생애처럼 겸허한 기도가

우리네 가슴속에 물 흐르게 하십시오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이 축복을 쏟아내는 5월

어머니,우리가 빛을 보게 하십시오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눈 뜨는

빛의 자녀가 되게 하십시오

 

이해인의 < 5월의 시> 전문

 

 

 자리를 잡고 종일 고생한 발을 살짝 물에 담근다.

순간 발이 저릿저릿하다.

계절은 벌써 여름으로 접어들었는데 숲속에 숨은 계곡물은 얼음장이네.

발이 놀랄까 싶어 얼른 꺼낸다.

한때 누가 이런 계곡물에 오래 발을 담그고 있나 시합도 했었는데...

 

 두 남정네는 머리까지 계곡물에 담근다.

시원하시겠습니다.

이때가 산에서 남자들이 가장 부러울 때다.

 

 피로를 좀 풀고 다시 등산화 끈을 맨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산길도 긴 셈이지.

 

열번도 넘게 계곡을 건넌 것 같은데 서너 번 더 계곡을 건너고 나니 운곡암이 보인다.

이제 정말 거의 다 내려온 것 같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운곡암 낡은 일주문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운곡암 한자도 이상하네.

일주문에는 '구름 雲字'를 썼는데, 암자 앞에 세워둔 돌에는 '김맬 耘字'를 썼다.

도대체 어느 것이 맞는 것이야?

 

산책 삼아 가족 나들이를 온 사람들이 계곡에서 노는 것을 보면서 걷는다.

정말 大路가 나왔군.

터덜터덜 걷는데 길 옆에 핀 꽃들은 우리 더위를 아는지 모르는지 화사하다.

아까시꽃 향기가 물을 건너오고, 찔레꽃 향기도 간간이 코를 찌르는 길이다.

 

 평화로운 동네다 생각하며 걷는데 육중한 건물이 앞을 막아선다.

'자연 속에 이런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허가가 났네.' 하면서 보니 개신교 기도원인 모양이다.

공중전화 박스 같은 곳에 들어가 기도를 하는 것 같은데 이런 날씨에는 그러다가 큰일이 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그런 박스가 마당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걸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물론 쓸데없는 杞憂이겠지만.

 

 오후 2시 30분, 큰골로 다 내려왔다.

물이 많은 계곡을 끼고 있는 동네라 큰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아니면 마을이 커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아침에 올라갔던 곳은 사기막골.

사기막골이라는 이름은 곳곳에 있는데 사기를 굽던 마을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아침 8시 50분에 산행을 시작해 오후 2시 30분에 산행을 마쳤다.

산에서 걷는 시간만 5시간쯤 걸렸는데 날씨 탓인지, 아니면 내 컨디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삐죽 솟은 산세 때문인지 유난히 힘들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화야산을 다녀오니 기분이 좋다.

 

 근처 편의점에서 간단히 맥주로 더위를 씻기로 하고 도로를 따라 걷는다.

그리고 아침에 이용했던 택시를 부른 다음 계곡가 편의점 의자에 둘러앉는다.

산행 후 갈증과 더위를 씻는데는 시원한 맥주만한 게 없다.

맥주를 쭈욱 들이키며 오늘 산행 이야기를 한다.

나도 고동산은 초행이고, 두 분은 고동산과 화야산 다 처음이란다.

오랜만에 진한 산행을 했다.

굽은 도로를 돌아오는 택시를 보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