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인가, 禾也山 (2)
화야산이나 고동산은 육산이다.
그래서 야생화가 많다고 알려져 있고 야생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얼레지가 많다고 했었나.
지금은 계절적으로 특별한 꽃을 보기는 어려운 때이지만 힘든 걸 잊으려 바닥을 살펴보아도 꽃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간간이 노린재나무 흰 꽃이 보이고, 쪽동백나무와 때죽나무도 앙증맞은 흰꽃을 매달고 있다.
녹음이 우거진 산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몸은 힘겹다고 아우성인데 눈은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나 할까.
이양하의 '신록 예찬'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알겠다.
정말 눈이 부신 5월이다.
말하자면 나의 흉중에도 신록이요, 나의 안전(眼前)에도 신록이다. 주객일체(主客一體) 물심일여(物心一如), 황홀하다 할까, 현요(眩耀)하다 할까,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장무애(無障無 ), 이러한 때 나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스럽고, 또 이러한 때 나에게는 아무런 감각의 혼란도 없고 심정의 고갈도 없고, 다만 무한한 풍부와 유열(愉悅)과 평화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때에 비로소 나는 모든 오욕(汚辱)과 우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마음의 모든 상극과 갈등을 극복하고 고양하여 조화 있고 질서 있는 세계에까지 높인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초록에 한하여 나에게는 청탁(淸濁)이 업다. 가장 연한 초록에서 가장 짙은 초록에 이르기까지 나는 모든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초록에도 짧으나마 일생이 있다. 봄바람을 타 새 움과 어린잎이 돋아나올 때를 신록의 유년이라 하면, 삼복 염천 아래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짓는 때를 그의 장년 내지 노년이라 하겠다. 유년에는 유년의 아름다움이 있고 장년에는 장년의 아름다움이 있어 취사하고 선택할 여지가 없지마는, 신록에 있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역시 이즈음과 같은 그의 청춘 시대―움 가운데 숨어 있던 잎의 하나하나가 모두 형태를 갖추어 완전한 잎이 되는 동시에 처음 태양의 세례를 받아 청신하고 발랄한 담록을 띠는 시절이라 하겠다.
이양하의 < 신록 예찬 > 중에서
가다 보니 줄이 드리워져 있다.
그 정도로 험한 곳은 아니지만 잠깐 긴장을 하게 된다.
만만히 볼 산이 아니군.
전에는 삼회1리에서 삼회2리로 화야산만 다녀가서 고동산은 이번이 처음이다.
화야산과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또다른 매력이 있다면 곳곳에 멋진 소나무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자태를 갖게 되었을까 정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사진을 찍느라 걸음은 더 느려진다.
핑계김에 천천히 가자고요.
능선에 올라서서 잠깐 쉰다.
발 아래쪽으로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데 시야가 뿌옇다.
날씨가 맑으면 전망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것으로도 만족해야지.
쉬는 동안 물도 마시고, 오이도 먹고 기운을 내 본다.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고, 머리도 금세 감은 것처럼 되어 버렸다.
벌써 '여름 산거지'가 되었나 보군.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처음으로 올라오는 사람을 만났다.
혼자 온 사람인가 싶었는데 앞서서 올라가다 보니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일행 중 체력 좋은 사람이 먼저 올라왔나 보다.
하기는 무척 단단해 보이는게 이 정도의 산은 동네 뒷산으로 여기지 않을까 싶기는 하네.
얼마나 왔나 싶은데 다시 된비알이다.
땀은 줄줄 흐르고, 다리는 천근만근, 가슴은 답답할 정도로 숨이 가쁘고...
멀쩡한 데가 한 군데도 없는 것 같다.
여러 가지 고생이군.
그래도 일단 오르기로 했으니 앞만 보고 가야겠지.
나만 이렇게 힘든가 싶어 바라보면 노총무도 동재씨도 저만큼 앞서가고 있다.
뒤에서 쉬던 사람들도 슬그머니 나를 추월했다.
셋이 일행인데 모두 잘 걷는 중년 남정네들이다.
성큼성큼 몸이 가벼워 보인다.
나만 계속 헤매고 있네그려.
힘든 걸 잊으려 바닥만 내려다보며 걷는다.
다른 야생화는 거의 보이지 않고 간간이 둥글레만 눈에 들어온다.
조롱조롱 매달린 꽃이 귀엽다.
이렇다 보니 어쩌다 만난 타래붓꽃이 환영을 받는게 당연한가?
걷다 보니 나뭇가지에 제2전망대라 씌어 있다.
오른편으로 북한강이 보이는데 흐릿하기도 하거니와 장소도 전망대라 하기에는 좀 민망한 수준이다.
제2전망대라는 글씨 아래에는 휴대전화 번호도 적혀 있네.
길을 잃었을 때, 아니면 산행이 힘에 부칠 때 전화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나?
어떤 의미로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 놓았는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앞서가던 노총무가 정상이라고 소리를 친다.
오전 10시 20분, 드디어 고동산( 해발 591m) 정상이다.
근처에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앉아서 편안하게 쉬고 있다.
온몸이 땀에 젖었으니 얼굴은 거의 벌겋게 익었겠군.
정상 표지석 앞에서 쉬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단체 사진을 찍었다.
고동산 전망이 좋다고 했는데 오늘은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니 마음을 비우자.
그래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지 않는게 도리어 다행 아닌가.
우리는 바로 화야산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고동산에서 화야산까지는 3.3km란다.
가파른 오르막길은 아니겠지만 산에서 짧은 거리는 아니다.
조금 여유를 찾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다.
걸으며 계속 느끼는 것이 老松과 枯死木이 꽤나 근사하다는 것이다.
대부분 멋진 소나무는 바위와 함께 있는데 여기는 육산임에도 소나무가 멋지다.
물론 인간의 시선으로 멋있다는 소나무는 나무 입장에서는 고달픈 삶을 살았다는 얘기겠지만
우리 같은 산사람에게는 볼거리가 되어 주니 눈이 바쁠 수밖에.
태풍에 뽑힌 나무뿌리도 대단하고, 앉기 좋은 자리를 만들어준 것 같은 줄기도 보기 좋고...
이리저리 살펴보며 사진을 찍느라 속도가 느려졌다.
가다 보니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에서 다시 고동산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추월했다.
정말 발이 빠른 사람들이다.
가만히 보니 이 팀도 우리처럼 걷는 순서가 딱 정해졌다.
나처럼 늘 꼴찌를 도맡아 하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도 나만큼 힘들겠다 싶다.
길은 낙엽이 쌓여 푹신푹신하다.
간혹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길이 나타나 진을 빼기는 하지만 그래도 능선이니 걸을 만하다.
혼자서 떡갈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노린재나무, 팥배나무...
눈에 보이는 아는 나무 이름을 중얼거린다.
푸르름이 하나 가득한 잎사귀들이 반짝인다.
싱싱한 생명력으로 빛나는 나무를 보면서 기운을 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