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여행 첫째날 - 슬도, 간절곶
다시 바닷가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몽돌해변에서 파도소리에 달그락거리는 돌들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한가롭게 걷는다.
벽화마을을 지나 소리체험관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슬도로 향하는 길은 전에는 없던 카페며 선술집 등이 들어서 아주 다른 느낌이 든다.
달라진 모습이 눈길을 끌어 연신 전화기로 사진을 찍는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거문고 소리가 난다 하여 瑟島라는 이름이 붙은 이곳은 경관이 아름다워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널리 알려졌다.
역시나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멀리 떨어진 등대까지 가는 길에는 고래를 비롯해 온갖 바다 생물을 바닥에 그려 놓았네.
입구에 있는 고래 조형물은 울주군을 대표하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따 왔다던가.
고래가 새끼를 등에 업은 모양이란다.
역시나 울산은 고래를 상징 동물로 삼아 고래박물관에 고래 축제, 고래 체험관 등 고래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구만.
근처를 오가는 고래에게 감사할 일이다.
두리번거리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젊은 친구는 역광이라 어둡다고 하면서 슬도 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준다.
어디를 가든 사진 한장씩은 남기자고요, 친구!
너의 눈이 천리를 안을 수 있다면
너의 눈이 천리를 안아 내 언저리에 둘러 앉힐 수 있다면
우리 가리 천리 함께 가리 강은교의 < 등대의 노래> 전문 |
여기에서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방어진까지 내처 걷기로 했다.
어차피 도보여행이니 걷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아 친구가 안 가 보았다는 간절곶에 가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방어진 터미널로 향한다.
그런데 전에 있었다는 간절곶 가는 버스 노선은 진작 폐쇄되었다고 하고 택시 요금은 생각보다 비싸다.
하는 수 없이 울산 시내까지 이동해 버스를 갈아타기로 했다.
열심히 스마트폰을 검색해 버스 노선을 알아보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방향감각이 없어서인지 아까부터 자꾸 반대편에서 기다리는 실수를 한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만 앞으로도 답답한 일이 많겠구만.
겨우 버스를 타고 한숨 돌린다.
시내까지 가서 간절곶 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데에 대략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단다.
전에 두 발로 걸었던 곳인데 도무지 감이 오지 않네그려.
버스는 돌고 돌아 1시간 넘게 걸려 옥성초교에 우리를 내려 놓는데 갈아타야 할 버스가 바로 앞에 지나가더니만 다음 버스는 언제 올지 감감무소식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30분 남짓 떨면서 기다리니 컨디션이 엉망이네.
버스 정류장에 바람 피할 곳 하나 마련해 놓지 않았다고 애꿎은 지자체 행정을 탓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시간이다.
겨울 바람에 떨다가 훈훈한 버스를 타고 나니 몸이 늘어진다.
친구는 멀미약 기운으로 꼬박꼬박 조는데 나는 근래 불면증으로 통 잠과는 거리가 머니 왜 그리 간절곶이 먼지...
정겨운 간이역이 있던 덕하를 지나 외고산 옹기마을을 뒤로 하고도 한참 버스는 달린다.
왼편에 회야강을 끼고 달리던 버스는 진하에 닿는다.
진하는 화려한 요트들이 인상적이었던 곳이지.
'뚜벅이'로 지났던 곳이라 기억이 생생하다.
진하 해수욕장 뒤편으로 서생포 왜성이 이어진다.
아픈 역사를 지닌 서생포 왜성을 한번 돌아보고 싶었는데...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해발 200m 고지에 일본군이 돌로 쌓은 성으로 계단식으로 되어 있단다.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불리는데 남해안 각지의 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하다고 한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곳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지구전을 펼칠 목적으로 축성하였는데
유정이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가토와 담판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서생포 왜성에는 문이 여러 개 있는데 그 중 서문만 살아나올 수 있는 문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지명이 '西生'面이 되었다는 說도 있다고.
버스는 진하를 지나 어두운 길을 달린다.
그리고는 오후 6시 35분 간절곶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어둠에 간혹 펜션의 불빛만 있는 곳.
예전에는 낮에 왔던지라 어둠 속의 간절곶은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불빛을 따라 발을 옮기니 멋들어진 시설에 조명을 밝혀 놓았다.
여기에 夜景을 보러 온 셈이 되었군.
해돋이로 유명한 간절곶을 알리는 위도 표시도 있고,
햇살이 퍼져나가는 느낌을 표현한 해빵을 파는 공간도 보이고,
기해년 돼지해를 표현한 귀여운 돼지상이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풍차에도 불을 밝혀 놓았고...
불빛이 흐르는 곳을 보다가 살짝 고개를 돌리면 어둠이 뭉텅이뭉텅이 자리잡고 있다.
시간이 늦어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재미없구만.
길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려운 곳을 돌아보다 발길을 돌린다.
저녁 먹을 곳을 찾으니 모든 음식점이 문을 닫았다.
여기에서 묵고 해돋이를 보는 것이 어떨까 친구와 의논을 하다가
시간이 다소 늦기는 했지만 다시 울산 시내로 가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이동하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배낭을 내려놓고 있는데 정류장의 의자가 따뜻하다.
지친 몸과 마음까지 따뜻해져온다.
겨울에 많은 곳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어디에서도 버스 정류장 의자에 난방이 되는 건 처음 접했다.
이런 배려까지 하다니 무척이나 고맙네.
배차 간격이 아주 뜸한 버스인데 아까 우리가 타고온 버스가 돌아오는지 다행히 얼마 기다리지 않아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태화루까지 가려면 한 시간 가량 걸리겠지.
그러고 보니 나는 오늘 무려 열 시간쯤 버스에 시달리는 셈이다.
새벽부터 밤 8시까지 보고, 듣고, 걸은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버스에서 보냈군.
태화루 버스 정류장에 내려 성남동 젊음의 거리로 들어섰다.
4년 전에 갑작스런 증상으로 약국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곳이다.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았는데도 많은 가게가 문을 닫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고등어구이로 저녁을 먹고 내일 아침 식사용 샌드위치와 우유를 사서는 밤 9시가 넘어 숙소를 찾아간다.
여유있는 여행을 계획했는데 본의 아니게 강행군을 한 셈이 되었다.
휴! 긴 하루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