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다시 한번 도전을 - 두타, 청옥 종주 (4)

솔뫼들 2018. 10. 15.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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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8시 35분, 추위에 떨다 얼른 움직이기로 한다.

아무래도 몸을 움직여야 추위가 가실 것 같다.

우리가 온 길보다 가야 할 길이 더 머니 마냥 늑장을 부릴 수는 없지.

두타산 정상을 즐기고 있는 세 사람에게 즐겁고 안전한 산행을 빌어주며 발길을 옮긴다.


 두타산에서 청옥산까지 거리는 3.7km.

2시간쯤 예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두타산에서 청옥산까지는 주로 능선이니 그다지 힘들지 않다고 로미에게 말했는게 급경사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이렇게 내려가면 두타산보다 더 높은 청옥산을 향해 숨이 턱에 차도록 올라가야 한다는 말 아닌가.

내 부실한 기억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로미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어 버렸다.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가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바닥에서부터 오르는 법이다
때로는 돌에 걸려 넘어지고
깊은 수풀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느 골짜기나 다 낯설다
그렇지만 우연히 선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가는 곳이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아득히 멀고 큰 산을 오르기 전에는
낮은 산들을 오르고 내림은 당연하다
아무도 산 위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오른 뒤에는
또다시 내려가는 길밖에 없는 까닭이다


 양성우의 < 아무도 산 위에 오래 머물지 못 한다 > 전문



 조심조심 내려가다가 돌아보니 깎아지른 것 같은 길을 로미가 살금살금 내려오고 있다.

발에 채이는 게 돌이고, 가끔은 물기 때문에 미끄럽기도 하고, 일찍 내린 낙엽이 쌓여 때로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길.

안전을 위해서는 속도를 줄이고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이슬 머금은 풀잎에 바지 아랫단은 벌써 축축해져 버렸다.


 산길 주변 나무들 키가 커졌다.

쉰움산에서 두타산 오르는 길 막판에는 나무들 키가 나보다 작았는데...

쉰움산 초입에는 참나무가, 정상 부근에는 소나무가 많았는데 다시 樹種이 참나무로 바뀌었다.

산길에 지천으로 뒹구는 도토리를 밟아 미끄러질 수도 있겠군.



 길을 가다 보니 철쭉 이파리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번 여름 극심한 폭염을 견디다 그렇게 된 모양이네.

아파트 발코니에서 키우던 동양란 몇 盆도 시들시들 말라가고 돈나무 이파리도 검은 점이 박힌 후 뚝뚝 떨어지더니만 사람이나 식물이나 급격한 기후 변화는 버티기 힘들겠지.

인간이 자초한 일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제 적당히 오르락내리락 반복되는 길이다.

조금씩 지쳐갈 무렵 오른편으로 멀리 보이는 동해 조망이 위안을 준다.

속이 다 후련하군.

높은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곳은 쌍용시멘트 공장인가?

해파랑길을 걸을 때 해변을 따라 늘어선 시멘트 공장과 원자력발전소 때문에 길은 엉망이 되고 풍경 또한 망가져 얼마나 약이 올랐던지...



 힘이 들고 다리가 무거워질 즈음  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이 빗질해 놓은 듯 펼쳐져 있다.

바로 코 앞에는 새빨간 단풍이 산뜻하고.

바야흐로 가을이 무르익어가는구나.

간간이 불어주는 바람이 등을 적신 땀을 식혀 준다.

이런 바람이 있어 그나마 산꾼들 어깨가 가벼워지지.


 그나저나 아침을 먹었는데도 배낭은 여전히 무겁다.

당일치기 산행이라고 해도 긴 산행을 생각해 물도 넉넉히 준비하고 간식도 충분히 챙겼으니 배낭 무게가 무거운 건 당연하다.

서늘한 날씨 때문인지 땀을 많이 흘려도 생각보다 물을 많이 안 마시게 되어 아직도 배낭에는 물 무게만 1.5kg이 넘는다.

힘들고 지쳐 배낭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로미도 배낭이 무겁다고 구시렁거린다.

배낭은 무겁고 또 배는 고프고...



 오전 9시 25분, 박달령에 도착했다.

이 길을 따라 하산하면 박달골로 해서 무릉계곡으로 이어진다.

다음에 두타산을 다시 탄다면 한번쯤 이 길로 하산을 해 보고 싶어진다.

청옥산을 못 가기는 하겠지만 이곳을 찾을 때마다 세번째 같은 길을 걸으니 변화를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박달령을 지나니 슬슬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문바위를 지났다.

대부분 문바위라는 이름은 사람이 드나드는 문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얻었던데 여기는 아닌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하나?


  문바위재를 알리는 이정표 옆 어느 산악회 비석에 청옥산까지 30분 걸린다고 새겨 놓았다.

여기서부터는 계속 오르막길인데 1.1km를 과연 30분에 갈 수 있을까?

백두대간을 달리듯 걷는 駿足들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산꾼들이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나도 비교적 속도가 빠른 편인데 글쎄나?

아무튼 산악마라톤을 하러 산에 온 것이 아니고 이제는 무릎 관절을 달래가며 써야 할 나이가 되었으니 쉬엄쉬엄 가자.



  가다 쉬고 가다 쉬고...

오르막길에서는 언제나 허리가 휠 만큼 고통스럽다.

그래도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정상에 도착하겠지.


 앞만 보고 걷는데 앞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오늘 두번째 산꾼들을 만났다.

우리는 오르막길이니 그 사람들은 내리막길.

두 남정네가 얼마나 가볍게 걷는지 부럽기 그지 없다.


 가는 길에는 투구꽃이 한창이다.

쉰움산에서는 어둠 속에서도 구절초가 하얀 빛을 내뿜더니만 보랏빛 투구꽃이 복스럽게 핀 모습도 보기 좋다.

조금 더 가니 둥근이질풀도 보인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4년 전에도 투구꽃에 눈길을 빼앗겼었다.

그때는 동자꽃도 피어 있었는데 계절이 좀 늦어져 동자꽃은 이미 졌나 보군.



 일부러  산길 옆을 쳐다보면서 걷는다.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또 배도 고프고...

사서 하는 고생이니 누구를 탓할 수 없지만 참 고생스러운 길이다.

앞서서 걷다가 로미를 기다려서는 두타산과 청옥산을 이어타는 산행은 내 인생에 두번 다시 없다고 다짐을 했다.

'망각'이라는 녀석이 나를 가지고 놀지 않기를 바라면서.

전에도 내가 이런 소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만만치 않은 산행이다.

몸은 천근만근이지 거리는 생각처럼 줄지 않지...


 학등을 지났다.

청옥산 못 미처 하산을 할 수 있는 길이다.

여기에서부터는 청옥산이 50m이니 기어서라도 갈 수 있겠지.

젖 먹던 힘까지 내어 한 발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