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 구병산 (2)
숨이 턱에 닿도록 헐떡이며 8부능선쯤 도착했다.
산길에 눈이 보인다.
오늘 산행에 반갑지 않은 복병이 되겠군.
북사면을 걸으니 어쩔 수 없이 눈길과 동행을 해야 할 것 같다.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면서 즐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부에서 갈림길과 만나 신선대 방향으로 오른다.
로미는 힘이 남는지 바윗길로 가겠단다.
나는 꾀가 나서 편한 길을 선택한다.
남은 길의 난이도를 모르니 체력을 아껴 두어야지.
그러지 않아도 숨을 몰아쉬다 보면 현기증이 나는데...
작년 몸과 마음을 고통스럽게 보내서 그런지 체중도 줄고,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작년 이맘때 달마산과 월출산을 탈 적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바위만 보면 겁이 나고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진다.
한 살 더 먹어서 그럴 수도 있고 작년의 충격일 수도 있고.
아무튼 무리를 하지 말고 산을 즐겨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그래야 오래 산에 다닐 수 있겠지.
오전 11시 15분, 신선대(해발 785m)에 도착했다.
대장이 110분 걸린다고 했는데 90분만에 온 셈이다.
교통 편의를 위해 안내산악회를 따라다니면 늘 시간이 신경 쓰이는데 시간에 그리 쫓기지 않아도 되겠군.
사진을 찍으면서 일행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런 다음 간식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여유를 부려 본다.
뒤쫓아 올라온 커플 사진을 찍어주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우리가 쉬는 동안 먼저 출발하고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좀더 쉬고.
이제 853봉을 향해 움직인다.
예전에는 봉학대, 백운대, 노적봉 등등 봉우리마다 이름이 있었다는데 어쩌다 이름을 잃어버리고 숫자로만 불리게 되었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예쁜 이름 하나 지어주면 안 될까?
이어지는 산길은 한겨울에 눈이 쌓인 것 같다.
거기에 위험을 알리는 안내판까지 서 있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는걸.
실수해서 눈길에 미끄러지면 오른편으로 그대로 구를 것만 같은 길이다.
853봉을 앞에 두고 우회로를 선택했다.
눈덮인 바위 봉우리 상황을 모르니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겠지.
뭐니뭐니 해도 안전이 최고 아닌가.
853봉을 오르고 싶어하는 로미를 말려 함께 우회로를 따라 걷는다.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끝에 힘을 주며 걷다 보니 속도가 느려진다.
예상과 다르게 일이 진행되는군.
내려갔다 다시 오르는 길은 늘 힘이 든다.
사서 하는 고생이니 불만은 없지만 바닥만 쳐다보면서 발길을 옮긴다.
여기가 병풍바위라고 하는 곳인가.
작은 암봉에 오르고 나서 853봉을 바라보니 눈맛이 시원하다.
853봉을 배경으로 바위와 사람과 소나무라...
이 맛에 산에 오는 것이겠지.
잠깐 숨을 돌리고는 다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봉우리가 아홉 개라고 했으니 다 넘지는 않는다 해도 아직 한참 남았겠지.
갈 길이 머니 힘을 내자.
낑낑 몸에서는 기름이 바닥난 것 같은 소리가 나지만 어쩌랴.
어차피 내가 가야 할 길인 것을.
가는 길 한켠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탐스럽게도 달렸네.
여기에는 오염물질이 없으니 그냥 먹어도 될 거라면서 박총무는 하나 뚝 따서 입에 넣는다.
시원하겠는걸.
달콤한 맛만 더하면 바로 얼음과자 아닌가.
눈길을 걷느라 힘겹기는 하지만 이런 쏠쏠한 재미에 3월 하순 뒤늦게 겨울산을 즐기는 시간이다.
그런데 조심을 한다고 했는데도 아뿔사!
눈길에서 왕창 미끄러지고 말았다.
한참을 내려가다 겨우 브레이크가 걸렸는데 넘어진 곳이 아프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 창피하기도 하고.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정신이 번쩍 드는군.
한숨을 돌리나 싶으면 다시 오르막길이 나타나고, 고물 자동차처럼 삑삑거리며 올라가고 나면 나타나는 험한 내리막길.
이런 눈길에서는 사실 내리막길이 더 위험하다.
뒤에 따라오는 박총무는 어느 새 아이젠을 착용했다.
로미가 내게 아이젠 한쪽을 빌려주겠다고 한다.
아직은 견딜 만하니 스틱에 의지해 가 봐야지.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고사목 사진을 찍고 걸음을 서두른다.
가다가 눈 쌓인 곳에는 도 하나 그려보고.
이즘 두 사람이 합해 하트를 그리고, 손가락을 이용해 하트를 만드는 등 하트 모양이 부쩍 유행을 한다.
사랑을 표현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반대로 사랑이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건 나만일까.
연대기를 알 수
없는
검은 책이다
먼
시간을 집대성한 페이지를 넘기면
불탄 새의 발자국이 떠도는
바람의
유적지
막다른 길에서 시간은 일어선다
이마에 매지구름 걸쳐놓고
진눈깨비
맞는 산,
박제된 새소리가 나이테를 안고
풍장에
든 까닭 차마 발설할 수 없어
활활 피우는 눈꽃은 은유다
명조체로
흐르는 햇살이 서술하는
몰락한 종교의 잠언서
나무의
필적이 행간을 읽는 동안
다하지 못한 어둠이 전하는 고전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허공을 수식하는 문장이다
숨찬 몇
권의 눈부심이 사리처럼 반짝인다
새떼들 젖은 울음이 밑줄을 긋고
구전하는
말씀들
일편단심이다
생은 뼈를 삭이는
절명시다
맨몸으로 그루잠을
건너온
울창한
기억들
작자미상의 목판본 한 질을 집필하고
있다
고경숙의 < 고사목 > 전문
잠깐 마음에 솜사탕 하나 담아 놓았더니 금세 찬바람이 휘익 분다.
나를 기다리는 건 험한 내리막 바윗길에 밧줄 하나.
길이 양쪽에 있는데 오른편이 수직 내리막길이란다.
우리보다 앞서가던 커플이 내려가기를 기다려 조심조심 내려간다.
밧줄이 있으니 그리 난감한 상황은 아닌데 앞사람이 헤매는 바람에 속도가 느려진다.
안부에 도착했다.
구병산 정상에 올랐다가 다시 이곳으로 와서 하산을 해야 한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점심을 먹는 모습이 눈에 띈다.
딱 점심시간이군.
그러고 보니 대장도 여기에 있네.
알은 체를 하고 인사를 하니 누구냐는 표정이다.
버스에서 짝꿍이었다고 하니 일주일에 짝꿍이 두번씩이나 바뀌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한다.
참 퉁명스럽기도 하다.
성격이 그런지 아니면 우리가 하는 농담처럼 집에서 부부싸움이라도 하고 나왔는지...
그러면서 시간 맞추려면 서둘러 다녀와야 한다고 또 재촉을 하는군.
못 말릴 사람이다.
일행을 만나 구병산을 향해 오른다.
가다 보니 왼편으로 구병산 정상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보이는데 사람들이 올라간 흔적이 없다.
눈 때문에 길이 사라진 것이다.
몇 발자국 걸으며 길을 찾으려다가 이내 포기한다.
잘 아는 길이라면 가능할텐데 상태를 모르면서 눈길을 헤쳐가는 건 모험 아닌가.
이번에도 우회로로 정상을 향해 걷는다.
오늘은 계속 우회로를 찾게 되는군.
금방 눈앞에 나타날 것 같은 길인데도 오르고 보면 구병산 정상은 뒤편에 있고, 또 뒤편에 있고...
' 나 잡아 봐라' 하면서 약을 올리는 것만 같다.
힘이 들어서 굼벵이처럼 걸어도 거리는 줄게 되어 있지.
천천히 걸어도 황소 걸음이라고 했던가.
언제 정상에 오르나 싶었는데 오후 12시 58분 구병산(해발 876m)에 도착했다.
오늘은 다른 산악회 사람들이 없어서 걷기에 아주 수월하다.
정상에도 서넛 먼저 온 사람들만 있을 뿐 시원한 바람만 오간다.
정상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저 멀리 사람 사는 곳을 내려다본다.
고사목 뒤에 산봉우리, 그리고 그 너머에 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마을이 있다.
숨을 고르고 생각에 잠긴다.
나는 여기까지 허위허위 무엇 하러 올라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