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둘러보기 (3)- 근대문화골목
K형!
점심을 먹었으니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걷습니다.
걷다 보니 계산성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영남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입니다.
여기에서 故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지요.
전에는 그런 사연을 적은 안내판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군요.
'계산성당' 하면 떠오르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했던 천재화가 이인성 말입니다.
전쟁 혼란기에 오인되어 총에 맞아 숨진 인물이지요.
그는 강렬하고도 토속적인 화풍 때문에 한국의 고갱으로도 불렸습니다.
이인성이 계산성당을 자주 그렸다고 하지요.
그래서 계산성당 앞 이인성이 그림을 그렸을 법한 곳에 서 있는 古木을 '이인성 나무'라 명명해 나무와 화가를 모두 기억하도록 했었는데 그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길을 따라 걷다 '뽕나무 골목'을 만났습니다.
명의 援軍으로 왔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뽕나무를 많이 길렀다는데에서 유래한 이름이지요.
명나라의 최고 풍수지리가였다는 두사충은 경상감영 자리를 명당이라고 하였다지요.
후일 경상감영이 안동에서 대구로 옮겨왔고, 지금도 그 자리가 대구의 중심가이니 그의 말이 들어맞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두보의 후손인 두사충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명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명나라가 기울고 청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정파를 옮겨다니는 것에 대해 말이 많지만 나라의 흥망성쇠와 충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드디어 민족시인 이상화 고택입니다.
사라질 뻔했던 시인의 집을 시민들의 힘으로 보존했다고 하던가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대표적인 저항시로 손꼽힙니다.
'빼앗긴 들'은 식민지 조선,'봄'은 독립을 의미하겠지요.
이상화 시인 집안에서는 대부분 형제들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36년이라는 긴 세월 일제에 나라를 잃었지만 독립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3.1절을 코 앞에 두고 선조들의 희생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이유입니다.
이상화 고택에는 이상화 시인이 사용했던 가구와 물품뿐 아니라 활동했던 시기 다양한 분야의 잡지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시인이 살았던 시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는군요.
골목을 사이에 두고 서상돈 고택이 있습니다.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전국으로 확산시킨 인물이지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도 있다는데 오늘 거기까지 돌아보기는 아무래도 무리 아닐까 싶습니다.
당일치기 여행은 어떤 곳인지 맛만 보고 가는 셈이지요.
골목 담벼락에 붙어 있는 골목투어 지도를 한번 들여다 봅니다.
처음부터 이 지도대로 다녔으면 주변을 더 쉽게 찾아다닐 수 있었겠다 싶습니다.
하는 수 없지요.
약전거리를 지나갑니다.
한의원들이 줄지어 있고 한약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다른 냄새보다는 한결 낫군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보약 한 재 먹은 것 같다는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걷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한약거리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은 건강보조식품이 발달해 전처럼 보약을 많이 먹지 않지만 한방과 양방이 협력해 나간다면 우리 의학은 모름지기 세계적인 수준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어물어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의 배경이 되는 곳을 찾았습니다.
6.25전쟁 후 한 집에 세들어 사는 네 가구와 주인집 사람들의 삶을 통해 다양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秀作이지요.
비극성을 일상성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책입니다.
그 책을 학창시절 읽었는데 최근 생각이 나서 다시 한번 읽어 보았더랬습니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데 주인공 길남이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 오는 것 같았지요.
지금은 음식점이 되었지만 그 현장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가상합니다.
사실 다른 나리를 여행하다 보면 의자 하나에 이야기를 곁들여 가 보아야 할 곳이라고 하는 걸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앉았던 곳이니, 누가 작품을 집필했던 곳이니 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문화가 만들어지고 사람들 마음 속에 자리잡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