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소요산 (3)
헉헉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오른다.
그러다가 다시 험해 보이는 길로 접어들었다.
사실 지름길로 보여서 위험해 보이는데도 그 길로 갔는데 늘 스쳐지나갔던 나한대가 보인다.
오후 1시 40분, 나한대(해발 571m)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별로 없다.
내리막길이 고약해 다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잔뜩 긴장하고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로 접어들었다.
긴장이 좀 풀렸나 싶자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역시나 바위와 소나무, 그리고 멀리 눈 쌓인 능선이 빚어내는 풍경이다.
이런 풍경이 불러서 추위를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겠지.
산에 안 다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런 날씨에 미쳤다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겨울 산만의 매력을 어찌 포기하랴.
사계절 우리 산하가 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겨울만이 가진 설화나 상고대나 흰선이 만들어내는 능선의 아름다움이나...
곱은 손을 무릅쓰고 사진 몇 장을 찍은 다음 조금 걸으니 의상대가 코 앞이다.
오후 1시 50분 의상대(해발 587m)에 도착했다.
여기가 소요산의 정상이다 보니 사람들이 눈에 띈다.
서로 사진을 찍어준 다음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해 단체(?) 사진도 찍었다.
한 발 딛기도 조심스럽게 미끌미끌한 바위에서 나는 얼른 내려왔는데 박총무는 경상도에서 온 사람들 사진을 찍어주며 몇 마디를 나눈다.
처음 소요산을 찾은 사람들인지 반대편으로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가 물었나 보다.
자기도 경상도 출신이면서 '의상대'를 '어상대'라 발음한다며 뒤이어 내려온 박총무가 웃는다.
경상도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당일치기로는 벅찬 일정이겠다.
남은 길은 비교적 무난하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여기 역시 계단이 놓여 있네.
몇 년만에 찾았더니 안전시설이 엄청나게 늘었군.
'성큼성큼' 발걸음이 씩씩해졌다.
물론 그러다가 눈길이 나오면 언제 그랬느냐 싶게 '살금살금'으로 변하기는 하지만.
걷다가 숨을 돌릴 겸 멀리 눈을 주면 소복히 눈을 맞은 군부대도 보이고
흠결 하나 없는 것 같은 풍경이 눈을 말끔히 씻어 주기도 한다.
서울 근교에서는 볼 수 없는 아득한 풍경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언제부턴가 우리가 사는 곳이 아수라같이 느껴졌다.
그러니 거기에 사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또 어떤가.
잠시나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오후 1시 30분 공주봉(해발 526m)에 도착했다.
전설에 의하면 소요산에 자재암을 창건하고 수행하던 원효대사를 찾아온 요석공주가 산 아래 머물면서 원효대사를 사모했다고 하는데 이 공주봉이라는 이름은 요석 공주의 원효대사를 향한 애끓는 사모를 기려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공주봉에는 꽤 널찍한 평지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전망대를 만드는지 이 추위에 공사가 한창이다.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아이젠을 착용하느라 바쁘고.
잠깐 망설인다.
위험한 길은 아니지만 내려가는 길이 더 미끄럽기는 한데...
박총무를 기다려 본격적인 하산길로 접어들었다.
초반부터 눈 쌓인 길이 기다리고 있다.
스틱으로 짚으며 내려가는데 조심조심 발을 딛자니 여간 신경 쓰이는게 아니다.
한참 그렇게 내려가다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젠을 했다.
넘어져서 시퍼렇게 멍이 드는 건 사양이지.
무심코 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온다.
전에는 몰랐던 길인데 이정표를 보니 주차장까지 거리가 훨씬 가깝다.
박총무와 의견을 나누고 지름길로 접어들었다.
자재암과 일주문을 거치지 않고 내려가는 길이다.
능선인데다 남향이어서인지 눈이 꽤 녹았다.
마음 편히 걷는데 여기에도 오르막길이 있네.
산길은 산길이구만.
어느 만큼 능선길을 걸었나 싶자 급경사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다.
급경사이면 거리가 짧다는 말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걷자.
그런데 이게 웬 일?
걸어도 걸어도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급경사에 넘어질세라 방향을 틀 때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박총무는 길이 꼭 뱀 같아서 그 길을 따라 걷는 자신도 뱀이 된 기분이란다.
정말 S자로 이어진 길이 꼭 스르르 몸을 감추는 뱀 같기는 하다.
동네 사람이 다니는 길 같아 보이는데 그래도 길은 잘 나 있다.
오늘 새로운 길 하나 발견했구만.
된비알이라 오르기는 무척 힘이 들겠지만 하산시 이용하면 좋으리라.
경사가 심해 쉬지도 못하고 구르듯 내려간다.
발에 쥐가 날 것만 같다.
하산길인데도 등에 땀이 주루룩 흐르는게 느껴진다.
거의 다 내려왔을까?
경사가 수굿해졌다.
무슨 이유인지 뿌리째 뽑힌 나무도 보이고, 눈 위에 살살 흩뿌려 놓은 것 같은 낙엽송 이파리도 보인다.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어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고은의 < 눈길 > 전문
오후 3시 20분 주차장에 도착했다.
모자를 벗자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에서 김이 오른다.
모자를 바꾸어쓰고 배낭 정리를 한 다음 전철역 방향으로 이동하며 잠깐 뒤풀이를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박총무와 산행은 지난 추석 연휴 북한산 12성문 이후 처음이다.
박총무가 오래 못 나왔네.
토속적인 물건들이 향수를 자극하는 '土家'라는 주점에서 파전에 막걸리로 간단히 뒤풀이를 하고 다시 서울행 전철에 몸을 싣는다.
집까지 가려면 무려 3시간 가까이 가야 된다.
따뜻한 곳에 자리를 잡으니 눈이 저절로 감긴다.
새벽부터 설치고 나온데다 종일 추위와 바람에 시달린 몸이 마구 늘어지는데
칼바람 몰아치는 능선과 청청한 자태를 뽐내던 소나무, 그리고 묵묵히 겨울을 감내하는 바위까지 오늘 내가 지나온 길이 눈 앞에서 그려진다.
그러다 스르르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