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달랏 셋째날 (2)
버스에 타고 있는 시간은 쉬는 시간이다. 이틀째 수면을 제대로 못 취해서인지 구수한 센터장님의 말씀이 때로 자장가처럼 들린다. 베트남은 더운 나라여서 사람들이 대개 새벽 5시에 일어나 7시에 일을 시작하고 점심을 먹은 다음 잠시 午睡를 취하다가 오후 1시에 다시 일을 시작해 오후 5시에는 하루 일정을 끝낸다고. 그러니 오후 8시가 되면 당연히 귀가해 휴식을 취하겠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깜빡 졸았나? 이번 일정은 자수박물관이다. 베트남 사람들 손재주가 좋은건 알았지만 이렇게 섬세하고 세밀한 작업으로 못하는게 없을 정도로 온갖 풍경과 인물, 漢字 등등을 자수로 만들어 놓은 작품은 놀라움을 넘어 정말 입이 벌어지게 만든다. 진짜 꽃 같아 한번 만져보고 싶고, 자수 작품에 있는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진다. 인물 자수 작품에서는 세밀한 터럭을 슬그머니 만져보고 싶기도 하고. 명암도 선명하고 심지어 앞뒤로 입체적인 작품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그런 작품이 가능할까? '예술'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네. 대부분 멀리서 보면 그림 같아 보이는데 가까이 가면 정말 한땀한땀 정성들인 자수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보기만 해도 내 눈이 침침해지고 손끝이 아릿해지는 느낌이다. 자수를 놓는 사람들의 피로도가 엄청나겠구나. 그런 것을 배려해 복지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나. 과로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배려하는 공간도 있다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군. 미로 같은 길을 지나니 이번에는 작은 폭포와 老巨樹가 용틀임하는 공간이 나온다. 자수박물관에는 자수 작품뿐 아니라 조경에도 신경을 써서 볼거리가 많네. 혼을 빼앗길 만큼 정교한 작품을 보다가 자연을 보면서 잠시 눈을 쉬게 하라는 뜻일까. 박물관 차원에서 참으로 다양한 걸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수박물관에는 다른 나라들과 교류를 하는 공간도 있는데 한국관은 유독 초라해 보인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자수가 있는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차원 아닐까 싶다. 몇 년 전인가 운현궁에서 전통자수 전시회를 본 적이 있는데 꽤 유명한 분의 전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찾는 사람이 별로 없고 보는 사람도 지나가다 들른 정도로 여겨졌다. 나부터 그랬으니까. 그러니 협회가 있다고 해도 외국과의 교류가 생각처럼 쉽지 않으리라. 이렇게 전통 자수를 발전시켜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만든 베트남이 부러워졌다. 다시 버스에 오른다. 이번에 가는 곳은 사원. 베트남에는 불교 인구가 가장 많다고 한다. 불교가 우리나라처럼 민간신앙과 결합된 형태를 보이고 있고. 호텔 로비 한쪽에도 불상이 놓여 있지는 않지만 제단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원은 靈福寺라는 이름을 가진 곳으로 일반적으로 龍절이라고 알려져 있다. 와! 대단하다. 규모도 대단하려니와 온갖 불상들이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동서양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소란스럽기도 하고. 생긴 지 불과 50년밖에 안 되었다는 이 사찰 정말 독특하네. 센터장님이 만날 시간과 장소를 정해 주고 알아서 보라고 해서 시간이 넉넉할 줄 알았는데 보기보다 넓은 곳을 돌아다니느라 발걸음이 바빠졌다. 어디를 먼저 가야 하나?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분주히 오간다. 지하공간에도 볼거리가 많은데 계속 내려가는 건 엄두가 안 난다. 넓은 공간에 이렇게 다양한 모습과 재료로 불상을 조성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리라. 玉, 炭化木, 도자기, 깨진 병조각, 마른꽃, 금 도금 등등 불상을 조성한 소재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실로 기상천외하다고나 할까. 특히 마른 국화를 이용해 조성한 관음보살입상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종교적인 신성함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대단한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 역시 엄청난 役事였으리라. 이걸 만든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는 작품(?) 앞에서는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인간의 思考와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단순하게 이런 것을 보며 감탄만 하는 나는 또 어떤 사람인가? 내리는 비가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시장 밑바닥에 굴러다니던 삼돌이란
놈이 임보의 < 도량 (道場)
> 전문 영복사에서 나오는 버스 안에서 이번 여행에 동참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 7팀인데 부부, 친구, 직장 동료, 자매, 모녀 등등 구성원이 다양하다. 서로 말을 주고받을 정도는 되었으니 남은 시간 좀더 친해지고 편해지자는 의미겠지. 80대 초반 고령임에도 친구분들끼리 여행을 온 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나는 과연 그 나이에 그럴 수 있을까? 결국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체력을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겠지. 비 내리는 호수가 내다보이는 카페에서 서초 부부가 내는 따끈한 차로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운치있는 곳에서 한없이 앉아 있고 싶어지는군. 사실 여행을 하며 이런 여유가 많을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쉴 틈 없이 끌려다니는 느낌이다. 물론 건기인데도 이상기후로 비가 내리는 바람에 일정이 뒤죽박죽 되었다는 센터장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안 그래도 되는데... 저녁으로 보쌈을 먹고 이곳 특산물이라는 아티초크 주문을 받았다. 서양의 불로초로 불린다는데 처음 이름을 듣고 마셔보는 차이다. 배추처럼 겹겹이 생긴 꽃봉오리로 만든 차인데 꽃으로 만든 것이어서인지 향기가 좋다. 집에서 연하게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몇 봉지 주문했다.
그런 다음 쇼핑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빅C 쇼핑몰 앞에 내려주었다. 나는 부산팀에게 신세를 진 걸 생각해 호텔에서 대접하려고 캔맥주를 몇 개 샀다. 전에 한 친구가 싱가폴 맥주인 타이거가 맛있다고 했었지. 하이네켄, 타이거, 베트남 맥주인 333을 섞어 10개 샀다. 맥주 가격이 우리나라의 반값 정도네. 호텔로 들어와 부산 언니 방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를 마셨다. '따루'의 박부장과 수지씨도 합류해 정겨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어느 덧 9시를 넘겼네. 이틀이나 제대로 못 잔 탓에 몸이 투정을 부려 편히 쉬라는 인사말을 뒤로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첫날은 썰렁하게 느껴지던 방이 이제 익숙해졌나 안온하게 느껴진다. 습기 때문에 좀 눅눅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줄기차게 내려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올리며 메모지를 꺼낸다. 학창시절 이하윤의 '메모광'이라는 수필을 접했다. 그 수필은 메모의 중요성을 실감나게 보여 주어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수시로 메모를 하는 습관을 들여 지금도 매년 수첩을 사서는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 가고, 무슨 책을 보고, 무슨 영화를 감상했는지 등등 매일 메모를 한다. 해마다 쌓인 수첩이 내 작은 역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요즘 느끼게 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못 믿을게 내 기억력이라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는 중이라 몇 자 끄적이고 잠에 빠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