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능선 달마산에 오르다 (2)
쉴 틈도 없이 일행이 오면 앞을 향해 달리다시피 걷는다.
단체 팀들을 추월하려 걷다 보니 아무래도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 덧 작은금샘 삼거리에 도착했다.
한동안 귀를 괴롭히던 사람들의 아우성이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좀 천천히 가는 것이 낫겠다 싶네.
쉬지도 않고 간다고 고문님이 불평을 하신다.
이 참에 아예 점심도 먹으면서 쉬자고요.
살짝 바위를 돌아가니 셋이서 앉을 만한 공간이 나왔다.
오전 11시 40분 좀 이르기는 하지만 아침에 싼 주먹밥과 남은 빵으로 요기를 한다.
워낙 운동량이 많으니 많이 먹어도 탈이 날 일은 없으리라.
점심을 먹으며 20분쯤 쉬었을까?
거리가 좀처럼 줄지 않으니 마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정말 누가 나를 속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정표상 거리가 줄지 않는다.
이럴 때 축지법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배낭을 메고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이라고는 하지만 우악스러운 바위뿐이고 나무는 거의 보기 힘들다.
그나마 바닷바람에 지친 키작은 관목들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상이고.
바위와 바람에 저항하지 않고 미리 몸을 숙인 것 아닐까.
크고 작은 암봉들이 끝없이 나타난다.
떡봉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지?
가다가 만나는 鞍部마다 미황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유럽에서 한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 것처럼 달마산의 모든 길은 미황사로 통하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시 줄에 매달리고 계단을 오르느라 숨을 헐떡이며 '떡봉' 중얼거린다.
정말 어찌 그리 편한 길을 보여주지 않는 산인지 새삼스럽게 야속해지려고 한다.
전에도 이렇게 힘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바위가 눈 앞에 나타날 때마다 저 바위를 어떻게 넘어가나 한숨이 나온다.
그런데 길은 교묘히 바위를 피해 옆으로 넘어가도록 나 있고, 바위 하나 넘고 숨을 몰아쉬고 나면 또다시 앞을 가로막는 바위가 있다.
꿈에서도 험악한 바위가 나를 위협하며 달려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나타나는 계단도 이제 힘이 부쳐 한번에 꼭대기까지 오를 수가 없다.
중간에 한번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어야만 겨우 오르게 되는군.
머리 속을 비웠다.
아무 생각 없이 다치지만 말아야지 생각하며 걷는다.
다행히 계단은 튼튼하고 암릉 사이에 간간이 조릿대가 늘어선 길도 보여준다.
떡봉은 어디인지 이제 잊었다.
걷다 보면 떡봉이 나오기는 하겠지.
가는 길에 이정표는 자주 나오는데 이정표가 일관성이 없다.
어디에는 남은 거리가 도솔봉까지 표기되어 있고 어디에는 도솔암 주차장이라고 되어 있다.
도대체 산꾼들이 무얼 믿고 다니라는 말인가?
이렇게 험하고 난이도 높은 산에서 사소한 것 하나도 믿기가 어려우니 참으로 답답한 일일세.
2시간 가량 걸었는데 겨우 1.2km 왔단다.
속도가 느린 건 알았지만 어이가 없다.
지도상에 나온 시간보다 산행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리겠는걸.
그렇다고 늑장을 부리며 쉬고 놀면서 걸은 것도 아닌데...
오후 3시면 하산을 하고 서울로 출발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림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더 이상 빨리 걸을 자신이 없으니 하산시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
급경사 내리막길에서 줄을 타려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정말 까마득해서 발끝이 조마조마한데 아래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린다.
내려다보니 편안한 평상복에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있는 아주머니가 보인다.
실실 동네 산책 나온 차림새인걸.
그런데 내가 줄을 잡고 내려가기도 전에 흰둥이가 바위를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중간에서 부딪칠 기세가 되니 아주머니가 흰둥이를 불러내렸다.
아니 저 개는 어찌 저렇게 바위를 잘 탄대?
릿지화를 신은 것도 아닌데...
꼭 전문 암벽 훈련이라도 받은 것 같다.
다 내려와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거리 감각이 없는 내가 떡봉이 머냐고 물으니 거의 다 왔단다.
떡봉에서부터 도솔봉까지는 길이 순해진다고.
그리고는 우리가 온 방향과 반대로 도솔봉에서 달마산 정상인 불썬봉으로 오르는 것이 덜 힘이 든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달마산에서 대해서는 꿰뚫고 있는 듯하네.
이 정도면 완전히 달마산 도사 같은 걸.
일행이 모두 내려오고 암벽을 타는 모습은 아니지만 아주머니와 흰둥이를 슬쩍 카메라에 담았다.
내려왔으니 다시 올라가야겠지.
이제는 지쳐서 말도 하기 싫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지.
'달마산 도사'를 만나고 난 뒤 신통하게 길이 평탄해졌다.
물론 가끔씩 바위가 나오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차원이 다르네그려.
비로소 여유를 찾고 멀리 바다를 접한 곳을 내려다본다.
아직도 뿌옇게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 사방을 점령하고 있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맛은 또 다르지.
바다쪽에서 슬그머니 꼬리를 감춘 산자락이며 봉긋봉긋 솟아오른 섬, 나지막하게 자리잡은 집이며 구불구불 경지정리도 되지 않은 논밭 등 모두가 정겨운 풍경들이다.
저 섬들은 뭍으로 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다에 떠 있는 것이 아닐까?
날씨가 산뜻하게 개었으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달마산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 눈 밝혀야 하리
안도현의 < 섬 > 전문
편안한 길을 오르락내리락 한다.
가끔씩 나오는 평지에는 떼지어 가던 사람들이 무리 지어 점심을 먹으며 쉬고 있다.
우리는 다녀간 지 오래 되어 어디에 쉴 만한 곳이 있는지 잘 모르는데 안내산악회에 단체로 온 사람들은 미리 파악을 하고 있었겠지.
물론 여기까지 와서 점심을 먹었으면 허기져서 더 기운이 빠지기는 했겠지만.
앞을 보고 열심히 가다가 일행이 많이 뒤떨어졌기에 다른 사람에게 길을 비켜주고 한쪽에 서서 기다렸다.
나를 추월해가던 남정네 한 사람이 내게 어느 방향으로 하산을 하느냐고 묻는다.
도솔봉 방향으로 간다고 했더니 자기랑 함께 가잔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 많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