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행기

남도삼백리길 - 천년불심길을 걸으며 (2)

솔뫼들 2017. 4. 9.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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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밥을 먹고 배낭에서 과일과 커피를 꺼내 후식까지 골고루 챙겨 먹은 다음 단체손님들이 떠나고 난 난롯가에서 잠시 쉬다가 고문님은 먼저 떠나셨다.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택시를 이용하기에도 도로를 빙 돌아야 하기에 다시 차를 가지고 송광사로 오시겠단다.

늘 그렇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시는 고문님께 죄송하고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

혼자서 선암사로 도로 내려가시려면 지루하고 힘드실텐데...

 

 난롯가에서 다른 팀의 말을 들으니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해발 884m)에는 눈이 내렸다고 한다.

3월 하순이기는 하지만 해발고도가 높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비는 하염없이 내리는데 우리도 10여 분 뒤 다시 배낭을 메고 송광사를 향해 출발한다.

 

 조금 걸으니 앞에 윗보리밥집이 보인다.

여기가 원조였군.

한 곳에서 20년이 넘게 하루도 안 쉬고 보리밥집을 하고 있다니 산신령이 다름 아닌 이 집 주인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오가는 길손들 보리밥 한 그릇으로 허기를 채울 수 있도록 해 주는 것도 보시 아니겠는가.

 

 

 가다 보니 송광사까지 3.3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깔딱고개.

아니 송광사 가는 길은 정말 쉽다더니 이래도 되는 건가요? 고상무님.

두두룩히 밥을 먹은 후 걸으니 몸은 더 무거워졌지 길은 미끄럽지 게다가 급경사이지...

선암사에서 걷는 길이나 송광사에서 걷는 길이나 난이도로 치면 도긴개긴인걸.

보리밥집 주인이 양쪽 모두 1시간 30분 걸린다고 하는데 어디가 쉽느냐고 하니 대답을 안 하더니만 이유가 있었네.

 

코 앞에 대피소 건물이 보인다.

배도사 대피소란다.

배도사에 대해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나.

배씨 성을 가진 인물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奇行을 보였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일부러 전설을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건 산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겠지.

 

 

 숨을 헐떡이며 올라갔다.

송광굴목재(해발 720m)이다.

고개라고는 하지만 사실 웬만한 산 하나 넘는 셈이다.

그러니 힘이 드는게 당연하지.

 

선암사에서 올라올 때는 큰굴목재가 있었으니 근처에 작은굴목재도 있을 것이다.

여기는 송광굴목재.

자연스럽게 굴목재라는 이름이 왜 생겼을까 궁금해진다.

 

굴목재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첫째는 일제시대 지하에 ‘굴’로 뚫릴 ‘목’이라 하여 굴목재라 했다는 설이다.

지금 실제로 좌우로 주암댐과 상사댐을 연결하는 수로가 지하로 뚫려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이 설은 원래 지명과 전혀 무관하다고 한다.

어원의 유래로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목재’란 뜻의 '골목재'나 수백 년 동안 조상들이 사용해온 ‘굴맥이재’로 사용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가는 길에 작은 대피소가 또 하나 보인다.

고상무님은 이제 길이 편해졌으니 잠깐 쉬어가자 한다.

대피소 안 의자에 앉아 비 내리는 3월의 숲을 바라본다.

 

 안개마저 자우룩이 숲을 덮고 있는데 모든 생명이 반기는 비가 내린다.

발 밑에서 꼬물거리는 생명도, 나무 위에서 푸드득거리는 생명도, 그리고 계곡에서 막 새로 시작하는 생명도

이 비가 고맙지 않을까.

비록 오늘 이 길을 걷는 우리를 조금 괴롭히기는 하지만.

 

 

 

 다시 길로 나선다.

계곡을 건너지르는 다리를 지나 왼편으로 안내문 하나가 보인다.

洗月閣과 滌珠堂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안내문이다.

법계에 들고자 하는 사람이 진정한 부처님의 성역인 우화각을 지나 사천왕문에 들어서기 전에 이곳에서 더럽혀진 영혼을 씻고 들라는 영혼의 목욕탕이었다고 한다.

세월각은 여성용, 척주당은 남성용이라고 하는데 여성을 달에, 남성을 구슬에 비유한 것이 돋보이고 재미있다.

송광사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있다고 하니 꼭 찾아보아야겠다.

 

 다음에 나타나는 안내문은 '보소'에 관한 것이다.

조선시대 척불정책으로 핍박받던 송광사 승려들의 절절한 애환과 항변이 담겨 있는 沼 이야기이다.

이런 것을 찾아내어 숲길가에 붙여 놓은 '曹溪山人'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리고 글을 읽으면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어느 정도 내려왔을까?

계곡물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무늬도 바라보고, 길가 나무에도 눈길을 준다.

조계산에는 소나무보다는 서어나무, 사람주나무, 고로쇠나무, 노각나무, 굴참나무, 층층나무 등이 주를 이룬다.

 대부분 잎새를 달고 있지 않으니 특징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알 수 있는데 이번에는 노각나무에 관한 안내문이 보인다.

 

 송광사 인근이 노각나무 자생지인 모양인데 보호해야 할 樹種으로 지정이 되었다고 한다.

노각나무는 황갈색 樹皮가 알록달록해 구별하기가 쉬운데 갓 돋아난 사슴뿔과 대비되어 나무이름을 鹿角나무라고 불렀다가 노각나무로 바꿔 부른 것으로 짐작한다나.

나무 껍질이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비단나무로 불리기도 한다니 매우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나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박하고 은은한 흰꽃을 피우는데다 가장 품질 좋은 목기를 만들 수 있는 나무라고 하니 잘 가꾸고 보호해야 할 우리 나무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번잡한 곳을 싫어해 수도권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하늘이 멀개지더니 보슬비가 는개로 바뀌었다.

종일 비가 내리는 셈이다.

조계산 안내지도판 앞에서 다시금 우리가 온 길을 되짚어본다.

그리 먼 길이 아니었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어하며 걸었군.

 

송광사 뒤편 늘씬한 대숲을 지난다.

남도에 오면 만나게 되는 이런 대숲이 내 가슴까지 서늘하게 해 주는 느낌이다.

기후변화로 수도권에도 대나무가 잘 자라기는 하지만 이런 느낌이 드는 대숲을 만나기는 어렵다.

대숲에서 청청한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려 깊은 호흡을 해 본다.

 

 

 송광사 경내로 접어들었다.

고문님께 전화를 드리니 벌써 주차장에서 올라오고 계시단다.

우리가 너무 늑장을 부렸군.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지.

긴 돌담이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가 내려오는 길에 안내문에서 본 세월각과 척주당을 찾아 본다.

전에 몇 번 송광사에 왔어도 그냥 지나치던 곳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작은 건물 두 개가 묘한 각도로 서 있다.

靈駕의 영혼을 씻어주는 곳이라니 생각에 잠기게 된다.

이승에서 지은 죄를 씻을 수 있다면...

 

 

 불일암 올라가는 갈림길에서 잠깐 법정 스님을 생각한다.

우리에게 '無所有'를 몸소 보여주고 입적하신 스님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진다.

진정한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은 가까이에서 우리에게 師表가 된 분이셨는데...

 

 남도삼백리길 중에서 이렇게 천년불심길을 걸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명품길이라는데 계절마다 우리에게 전해주는 느낌이 다르리라.

다음에 녹음이 우거진 날 녹음에 취해 걷는 것도 좋겠지. 

낙엽이 흩날리는 날 걷는 것도 색다른 느낌을 주지 않을까.

겨울이어도 그다지 험하지 않으니 걷는데에 무리가 없을 것이고.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 나그네 > 전문

 

 

 내려가다가 부지런히 올라오시는 고문님을 보고 손을 흔들고는 헤어진 지 오래 된 것처럼 우리가 온 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선암사에서 오르는 길이나 송광사에서 오르는 길이나 비슷하다, 조계산 역시 돌이 많다 등등.

고문님께서는 내리막길이니 한손에 우산을 들고, 한손에 스틱을 들고 부지런히 걸으셨단다.

아무리 그래도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도로상 짧은 거리가 아니고 속도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정말 빨리 오셨다.

자동차로 40분쯤 걸렸다고 하신다.

어찌 되었든 고문님 덕분에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편안히 차에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