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갯가길 2코스를 걸으며; 방죽포에서 무술목까지 (1)
아침을 간단하게 챙겨 먹고 드물게 있는 버스 시간에 맞추어 버스 정류장으로 나간다.
오늘은 어제 트레킹을 시작한 방죽포에서 북쪽으로 갯가길 2코스를 걸을 예정이다.
방죽포에서 임포까지 걷는데는 3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버스는 이내 우리를 내려 놓는다.
오전 9시, 방죽포에 내려 어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곳을 돌아본다.
마을과 사람들을 지켜주는 솔숲이 눈에 들어온다.
조성된 지 꽤 오래 되었는지 우듬지가 하늘을 향해 찌를 듯이 솟은 나무도 있고,
줄기가 거북이 등껍질처럼 된 나무도 있고,
나뭇가지가 땅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늘어진 나무도 있다.
어떤 것이든 사람들의 마을에서 평화를 만들어주는 느낌에 내 마음도 저절로 푸근해진다.
이런 마을숲을 만든 조상들의 지혜가 감탄하게 된다.
거북이 모양을 따라 발길을 옮긴다.
2코스 역시 3코스처럼 바로 산길로 이어진다.
초반부터 계단길이네.
오늘 트레킹도 만만치 않겠는걸.
산길이니 당연히 오르락내리락 경사가 있지,
게다가 낙엽이 쌓인 곳도 많지,
물기까지 살짝 있으니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길이다.
오른편으로는 계속 바다쪽 낭떠러지이다.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순간 넘어질 뻔 했는데 머리끝이 쭈뼛하다.
굴러떨어지다 다행스럽게 잡목 가지에 걸릴 수도 있겠지만 나뭇가지가 나와 배낭 무게를 견디지 못 하면 바로 이승과 작별하게 되겠지.
참으로 아슬아슬한 길이다.
10년 전쯤인가 山 선배가 해외 트레킹을 갔다가 실족을 해서 유명을 달리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깊은 골짜기에 떨어져 며칠간 시신을 찾지도 못 했다던가.
누구에게든 닥칠 수 있는 문제라는 생각과 그 선배의 얼굴이 떠올라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 했던 기억이 난다.
잔뜩 긴장을 하고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다가 잔잔해 아무런 소음이 없는 상태에서 들리는 투명하고 영롱한 소리.
그 소리만으로도 잠시 마음이 풀어졌는데 물소리를 따라가 보니 동굴이 있네.
그리 크지는 않은데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동굴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혹시나 도롱뇽 알이라도 있을까 싶어 두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보았지만 낙엽만 둥둥 떠다니고 있다.
잠시 동굴 옆에서 친구를 기다려 동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다시 발길을 옮긴다.
친구는 잠시 쉬자고 하는데 길이 딱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고 평지도 거의 없어 쉴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다.
하는 수 없이 한참 가다가 겨우 두 사람이 앉을 만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는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숨을 돌려야지.
커피를 마시며 주위를 돌아보니 자잘한 꽃들이 자기를 봐 달라고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저건 산자고, 저건 노루귀...
봄꽃과 눈을 맞추기 위해 자세를 낮춘다.
아직 2월인데 먼 남도까지 내려오니 다른 사람보다 일찍 봄을 맞는 기쁨도 있구나.
다시 배낭을 둘러멘다.
길은 비슷비슷하게 이어진다.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 길이다.
생각없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만 돌이 마구 굴러떨어진다.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멍 하니 서 있었다.
자칫 돌에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네.
어떤 동물인가가 사람 발자국 소리에 놀라 도망가다가 돌을 굴린 모양인데 동물은 흔적도 없고 금세 숲에는 적막만이 흐른다.
그저 그런 길을 말없이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줄에 매달려야 하는 구간이 나온다.
경사가 심한데다 아래는 바로 바다쪽 낭떠러지.
팔에 힘이 빠지면 그대로 추락이다.
온몸에 힘을 쓰면서 겨우 내려간 다음 바라보니 친구는 별 무리없이 편하게 내려온다.
내 몸에 가끔 문제가 있나?
바다 가까이에 가면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주저앉을 것 같은 느낌이 걷는 동안 종종 든다.
그러니 더 지치고 피곤할 밖에.
다시 평탄한 길이 나온다.
걷는 중에 한쪽으로 줄이 매어져 있고 종이에 무어라 씌어 있기에 다가가 보니 길이 아니니 가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자기가 갔다가 고생했으니 가지 말라고 친절하게 써 놓았는데 표현이 좀 과격하다.
갈림길처럼 보이니 갯가길 본부에서 이런 곳에도 제대로 표시를 해 두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 마을이 보이는 듯하다.
운동을 나온 주민 한 분이 혼자서 걷느냐고 내게 말을 건다.
걷는 길에 거의 사람을 볼 수 없었는데 사람을 만나니 반갑다.
일행이 있다고 하면서 인사를 나누고는 내처 걷는다.
두문포가 내려다보이는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바로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난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멧돼지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면서 위로 올라간다.
거리가 불과 10m도 되지 않으니 만약 공격을 해 온다면?
그 순간 평소 멧돼지를 만났을 때 대처요령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온몸이 오그라들고 머리가 하얗게 된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다행히 멧돼지가 아주 큰 녀석이 아니고 우리를 공격할 의도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마을로 내려서서 그제사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 깊은 산이 아닌데도 큰 짐승이 있는 걸 보면 상위 포식자가 없다는게 얼마나 큰 생태계의 문제인지 알 것 같다.
3년 전 해파랑길을 걸을 때 삼척 구간에서 멧돼지 무리를 만났었지.
하지만 그때는 멧돼지가 한 가족 같았다.
우리와 거리도 멀었고, 큰 것 한 마리를 따라 작은 녀석들이 올망졸망 따라가는 상황이었으니
도리어 우리가 공격할까 멧돼지가 신경이 쓰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걷는 길에 멧돼지를 만나는 일이 발생하니 대처요령을 숙지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든다.
이렇게 마을 가까이에 멧돼지가 있으니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