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도 거창한 봉황산에 오르다 - 대협곡 (2)
길가에 희끗희끗 잔설이 있다.
9월 28일에 눈이 왔다는 가이드의 말을 김사장님이 통역하신다.
여기는 이미 겨울에 들어섰구나.
여름에 알프스에서는 푸른 들판에 눈이 내렸는데 지금 여기는 떨어진 낙엽 위에 쌓인 눈.
쓸쓸하다.
빙빙 돌아가는 계단길을 따라 오르는데 곳곳에 500년 되었다는 나무가 보인다.
나무 줄기가 굵어서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정확히 500년인지 아니면 과장인지...
고문님은 중국인들은 본래 허풍이 심해서 깎아 들어야 한다며 못마땅해 하신다.
그래도 일단 믿어보자고요. 후후
멀리 전망대가 보인다.
부지런히 올라가니 전망대를 만드는 공사중이었다.
아래에 무너진 전망대가 있는데 철거하지 않고 그 위에 새 전망대를 만들고 있었다.
들어가지 말라는 줄을 넘어 들어가니 위치가 좋아서 멀리까지 보이는데 날씨 때문에 흐릿하다.
오늘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다는데 해가 났다가 흐렸다가 바람이 심해졌다...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그래도 춥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산행 중 중국 사람들을 한 사람도 못 만났는데 언제 올라왔는지 여기 몇 명이 사진을 찍고 있다.
우리 같은 등산객이 아니라 사진을 찍을 목적으로 올라온 사람들 아닌가 싶다.
우리랑 같은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들은 산책 삼아 온 사람들이었나?
일행이 오는 것을 확인하고 내처 걸으니 여기저기 쓰러진 나무들이 보인다.
2012년 태풍 볼라벤의 영향으로 부러졌다고 한다.
김사장님 말씀에 의하면 여기는 태풍의 영향을 거의 안 받는다고 한다.
태풍은 대부분 필리핀이나 대만에서 만들어지는데 올라오는 동안 힘이 빠져서 여기까지 왔을 때는 바람이 힘이 없다는 말씀이다.
드문 일인데 볼라벤이 세기는 했던 거네.
바람이 한바탕 소리를 내며 분다.
햇볕이 들어가면서 서늘하게 느껴져서 겉옷을 다시 입는다.
불어제끼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졌던 낙엽이 공중으로 흩날리더니만 낙엽비가 되어 다시 내려온다.
늦가을 정취를 제대로 느끼는 날이다.
가을바람이
한데 모여
소곤소곤 얘기한다
“난 빨강 물감 가지고
고추밭으로 갈 테야.”
“난 노랑 물감 가지고
탱자나무 울타리에 갈 테야.”
“난 주황 물감 가지고
떡갈나무 숲으로 갈 테야.”
“난 누렁 물감 가지고
농사꾼 아빠들이 지어 논
곡식들로 갈 테야.”
가을 바람들이
가만가만 얘기하고
제각기 흩어져 갔다
산이랑 들판을
곱기곱기 칠했다
권정생의 < 가을바람 > 전문
오르막은 끝났다.
평지나 다름 없는 길을 가다가 물이 흐르고 벤치가 있는 곳에서 쉬어가기로 한다.
잠깐 햇살이 따뜻하다.
우물이 있던 곳을 판자로 막아 놓은 걸 테이블 삼아 정상주도 한 잔, 그리고는 취향껏 커피와 홍차, 홍삼차 중에서 골라 마신다.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평소에는 미끄럼틀을 이용해 순식간에 내려갔다는데 미끄럼틀은 9월말에 철수했다고 한다.
장가계 갔을 때 대협곡이라는 곳에도 이 미끄럼틀이 있었지.
경사가 심한 곳에 시멘트로 미끄럼틀을 만들어 놓았는데
바닥에 방석을 깔고 손에 장갑을 낀 채 손으로 양쪽 틀을 잡아 속도를 조절하면서 내려가게 되어 있다.
속도를 조절하라고 그랬는지 구불구불 돌려 놓았는데 그 거리가 무려 1km가 넘는단다.
가끔 중국은 참 재미있는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자연 보호론자들이 떼를 지어 시위를 하겠지.
자연 보호는 물론 중요하지만 때로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엇이든 過猶不及 아닌가.
급경사 계단길이 이어진다.
앞으로 고꾸러질세라 살금살금 조심조심 내려간다.
미끄럼틀이 끝나는 지점에 또 폭포가 있다.
폭포가 5단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五瀑布라고 한다는데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다.
늦가을이라 수량이 적다고 해도 이름값을 못 하는구만.
물길을 옆에 끼고 내려가는 길이 이어진다.
다른 소음 없이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면 스트레스지수가 확 낮아진다는 연구도 있다지.
자연 속에 푹 파묻힌 기분이 든 시간이다.
반 이상 내려온 것 같다.
앞에 멋진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내려오는 물을 피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것 같은데 가만히 보니 거기에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자연과 인공을 가리지 않는 대단한 생명력이다.
비록 가지가 부러지기는 했지만 문어가 무지막지하게 다리를 뻗은 것 같은 모습 앞에서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단체로 기념 사진을 찍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중간에 갈림길이 나왔다.
가이드는 왼쪽은 재미가 없다고 오른쪽으로 가자고 한다.
가다 보니 올라갈 때 가던 길이다.
굳이 이 길을 다시 걸을 필요가 없었는데 가이드가 산꾼의 기본을 모르는군.
오후 11시 50분 산행을 마쳤다.
대기중인 버스에 올라 산장으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낙엽비가 내리는 날 가벼운 산책을 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