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을 질주하는 법
도서관 서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책을 손에 잡았다.
생각보다 울림이 있는 책이어서 보다가 중간중간 생각에 잠겼다.
나라면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어떻게 대응했을까 고민하면서 읽었다고나 할까.
이 책은 개 '엔조'의 시선으로 펼쳐진다.
주인은 카레이서이자 정비사인 데니.
데니는 이브와 결혼하고 조위를 낳은 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데 아내인 이브가 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장인과 장모가 하나뿐인 딸 조위의 양육권을 가져가려고 하는 것.
그런 일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는지 개 엔조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람으로 살면 얼마나 힘들까. 계속 욕망과는 반대로 살아야 하니까. 자기에게 가장 좋은 것보다는 옳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근심해야 하니까. 나라면 그런 수준까지 감당할 능력이 되는지 무척이나 의심스러웠다. 내가 되고 싶은 인간이 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인간과 소통을 할 수 없어 답답해하는 개 엔조는 나중에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나 데니의 고민을 보면서 자기가 과연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모든 걸 잘 해낼 수 있을까 생각하는 대목이다.
'매일을 죽음에게서 훔쳐낸 듯이 살자!'가 내가 살고 싶은 방식이다. 이브가 그날 삶의 환희를 느꼈듯 난 늘 삶의 환희를 느끼며 살고 싶다. 매일이다시피 더해지는 무거운 짐과 고뇌, 분노를 떨치고 살고 싶다. 내가 살아 있다고, 난 근사하다고 말하며 살고 싶다. 난 근사하다. 그게 내가 열망하는 삶이다. 사람이 되어서도 그런 삶을 영위하련다.
이브의 투병 중에 이브가 생에 대한 애착을 보이며 '오늘이 내가 죽지 않은 첫날이예요. 그러니까 파티를 하자고요.'라고 한 말을 들으며 엔조가 한 생각이다.
인간을 보면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비록 개일망정 생각하게 되겠지.
사실 사람도 그렇게 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개 엔조는 철학자 같다는 표현이 나오는 모양이다.
혼자 있는 건 중립적인 상태이다. 마치 바다 밑바닥에 사는 눈먼 물고기 같은 것이다. 눈이 없으니 무엇을 평가할 수가 없다. 그게 가능할까? 주위 상황이 내 기분에 영향을 주지 않고, 내 기분이 나를 에워싼 것들에 영향을 미칠까? 정말 그럴까?
외로움은 세상이 아닌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바이러스처럼 의자가 있는 숙주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
이브가 세상을 떠난 후 데니가 딸 조위의 양육권 문제로 장인, 장모와 법적으로 다투는 장면에서 나온 엔조의 생각이다.
성폭행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딸의 양육권을 빼앗기기 일보 직전의 상태.
거기에 변호사 비용으로 코너에 몰려 있다.
데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나는 빗속을 달리는 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안다. 균형의 문제이자 예측과 인내의 문제이다. 빗속에서 성공적으로 달리기 위해서는 드라이빙 기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신력이 중요한 문제이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트랙은 차의 연장선이며, 비 역시 연장선이다. 하늘이 비의 연장선이라는 걸 믿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내 자신이 아니라는 걸 믿어야 한다. 내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나라는 걸 믿어야 한다.
이 책의 제목이 '빗속을 질주하는 법'이다.
엔조의 주인인 데니가 카레이서이니 그런 제목을 붙였겠지만 어쩌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는 것 아닐까.
빗속은 바로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과 어려움을 뜻하겠지.
데니가 여러 가지 고민 끝에 딸의 양육권을 놓고 장인, 장모와 타협하려 할 때 엔조가 서류를 더럽혀 방해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말은 못하지만 데니에게 자식의 양육원을 포기하지 말라고 간청하는것이겠지.
결국 진실과 주위의 도움으로 이겨내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환생을 믿는 동양적 사고방식을 가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엔조는 예지력까지 갖춘 명석한 개 아닌가.
엔조가 나이 들어 죽음을 맞은 후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원했고 나중에 이탈리아 명품 스포츠카 회사에서 일할 때 데니를 찾아온 아이가 '엔조'의 환생으로 나온다.
따뜻한 결말이다.
가슴이 촉촉하게 젖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