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 구병산 (3)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아까 포기한 지름길로 가 보기로 했다.
눈이 많아 로미한테 아이젠 한쪽을 빌려 등산화에 채운다.
有備無患인데 급한 성격에 겨울장비 일찌감치 정리해 놓고 애를 먹는군.
아이젠이 내 신발에 안 맞아 헐렁하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그나마 조금 안심이 된다.
맨 앞에서 가다가 박총무한테 살짝 양보(?)한다.
급경사인데 눈이 쌓여 있으니 눈 아래가 어떤지 어떻게 알겠는가.
한 발을 딛고 상태를 보아가며 다른 쪽 발을 딛고.
나무 사이로 가다가 돌을 잡고 돌기도 하고, 나무 뿌리를 잡고 겨우 중심을 잡기도 한다.
오늘 많지는 않은데도 눈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느낌이다.
무척 긴장을 했는데 내려오고 나니 거리가 아주 짧다.
우회로는 말 그대로 돌아가는 길이니 길었구만.
아까 올라갈 수도 있는 길이었는데 초행이다 보니 눈이 쌓여 길이 사라진 곳에서 지레 겁을 먹은 것이었다.
눈치를 보다가 우리 뒤를 따라온 사람은 덕분에 빨리 내려왔다.
휴!
한숨을 내쉬고 鞍部에 자리를 잡았다.
몇 팀이 점심을 먹고 있고 대장은 사람들을 보면서 역시나 하산을 서두르라 하고는 내빼듯이 내려간다.
시간을 보니 오후 1시 15분.
눈길 때문에 미끄러질까 조심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렇다고 점심을 굶고 갈 수는 없지.
단출하게 셋이니 한쪽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꺼낸다.
그런데 마음이 급해 그런지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군.
점심을 먹으면서도 온통 하산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하산 거리는 4km, 2시간 걸린다고 했다.
남사면이니 눈은 없을테고 올라올 때 생각하면 급경사 내리막길이 이어진다고 보아야겠지.
그러면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점심을 포기하고 내려가는 커플이 보이고, 정상에서 빵 한 조각으로 점심을 때운 사람도 내려간다.
우리보다 점심을 먼저 먹은 사람들도 정리를 하고 있네.
건너편에서 컵라면으로 혼자 점심을 하는 사람을 힐끗 바라본다.
모르기는 해도 그 사람도 우리를 보며 위안을 삼고 있지는 않을까.
아이젠을 벗어 로미한테 건네고 배낭을 정리한다.
오후 1시 35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20분만에 점심을 먹고 배낭을 멘다.
하산이니 스틱을 길게 뽑고 후다닥 내리막길로 들어선다.
하산길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급경사인데다 삐죽삐죽 날카로운 돌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그 위에 낙엽이 쌓여 있어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최소 전치 4주는 나오겠는걸.
긴장을 풀지 못 하고 달리다시피 걷노라니 무릎이 삐걱거리는 것 같다.
눈길을 겨우 지났나 싶으니 이번에는 급경사 너덜길이 기다리고 있으니 다리가 주인 잘못 만나 고생이 자심하다.
오늘 구병산을 타는 동안 나도 그렇고 박총무도, 로미도 모두 눈길에서 한번씩 미끄러졌다.
겨울을 그냥 보내기 섭섭했음인가.
하산이 그런 면에서는 더 위험하다.
아무리 급해도 안전하게 내려가는게 더 중요하니까.
조금 내려가자 치솟은 바위 절벽 사이로 길이 나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기도 힘든 절벽 사잇길을 그저 생각없이 걸어 내려간다.
물을 건너기도 하고, 철계단을 소리내어 내려가기도 하고, 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곳에서 돌아가기도 하고...
돌이 많아 발바닥에 불이 나는 길이다.
몇 번 소리가 나기에 돌아보니 박총무는 다리가 풀렸나 두 번이나 더 넘어졌다.
바위에 엉덩이를 다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이렇게 급하게 걷는 건 숨이 가쁘지는 않지만 무릎에는 엄청나게 무리가 될 것이다.
잘 아는 길이 아니니 부리나케 걷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지만.
마음이 급해도 방심하지 말라고 내리막길 경사가 급하다.
거기에 가끔씩 줄에 매달려 대롱거려야 하는 곳도 나오고.
볼수록 호락호락하지 않은 산이다.
이번에 경험을 했으니 다음 번에는 우리끼리 여유있게 산을 타는 것도 좋으리라.
제대로 구병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하산인데도 빨리 걸어서 그런지 등이 촉촉하게 젖는다.
정말 발에 모터라도 달아야 하는 것일까.
시간에 쫓겨 경치 구경을 제대로 못 하고 걷는게 마음에 안 든다고 박총무는 구시렁거린다.
그러고 보니 쌀난바위를 찾아보지 않고 지나쳤다.
다른 소음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물소리가 귀를 적시는 시간이다.
오른편으로 바위가 쏟아져 내려온 곳이 보인다.
누가 바위봉우리를 내동댕이라도 친 것일까.
가끔 산에 다니다 보면 그런 의구심이 드는 곳을 만나게 된다.
너른 곳에 비슷비슷하게 생긴 뾰죽한 바위들이 수없이 굴러내려온 곳.
지질학이나 기상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수시로 궁금증이 일지만 그대로 통과하게 된다.
이 계곡이 숨은골이다.
바위 사이에 숨어 있다는 말이겠지.
오염물질이 없어서 마셔도 되는 물이라고 하면서 박총무는 손으로 계곡물을 떠 마신다.
그래, 이왕이면 산삼 썩은 물이라고 생각하시게나.
一切唯心造라고 하지 않았던가.
컵라면 먹던 사람을 아까 추월했고, 이번에는 말을 걸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던 커플을 지나쳐 간다.
점심 먹고 벌써 여기까지 내려왔느냐고 놀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내리막 산길에서 달리는게 좋은건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달릴 수 있지요.
정말 다 내려왔다.
계곡길 옆 데크를 따라 걷자 평지가 나타난다.
이제 숨을 돌려도 되리라.
빙글빙글 마을길을 따라 걸어야 되지만 눈앞에 주차장이 보이니 마음이 놓인다.
커다란 위성 안테나가 보인다.
올라갈 땐 못 본 것이다.
방향이 달라서 눈에 안 띄었나 보다.
산자락에 평화하게 자리잡은 마을과 인삼밭, 그리고 시골집 담장 곁에 있는 감나무.
간혹 농사일을 준비하는 농부들의 모습도 보인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거기 산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산 너머 풍경이 그리운 때문이다. 산기슭 어느 한적한 마을이 그려지는 것이다. 산을 넘으면 또 산. 그 너머 널따랗게 펼쳐진 들을 지나 뉘엿뉘엿 해 넘어가는 산 그 어디쯤.... 피처럼 나를 당기는 풍경이 그리웁기 때문이다. 그 풍경, 실은 나도 몰라, 산 넘어 산마을 지나, 강 건너 들을 지나 해지는 서산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먼산 바라기를 하는 것이다.
박찬의 < 먼산바라기 > 전문
짧은 구간 속리산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아침에 속리산 둘레길 홍보차 토요일에 트레킹을 한다는 모임을 보았다.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관악산 둘레길, 한라산 둘레길...
내 체력이 지금보다 떨어지면 한번쯤 걸어야 할 길이다.
할 일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그런 자락길을 걸을 생각을 하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오후 2시 35분, 드디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9.3km 5시간 30분 걸린다던 거리를 중간에 점심까지 챙겨 먹고 4시간 50분만에 다녀왔다.
하산은 4km를 1시간만에 주파한 것이고.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걸은 셈이다.
그런데 구병산 아홉 개의 봉우리 중 몇 개를 걸었을까?
지도를 들여다보며 세어 본다.
신선대 오른편으로도 봉우리가 있었고 구병산 지나서 쌀개봉도 있었다.
지도상 대략 6개의 봉우리를 넘은 것 아닌가 싶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애썼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오래 전 구병산을 다녀간 것 같은데 기억이 다르다.
엄청난 암릉을 기어오르느라 바짝 긴장을 했었고 거기에 서서 호기롭게 사진도 찍었는데...
구병산을 타는 내내 이 한심한 기억력을 탓했다.
나중에 찾아 보니 전에 간 곳은 속리산 자락 관음봉과 묘봉 구간이었다.
경치가 멋들어져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마음만 굴뚝 같다.
마무리를 하고 잔디밭에 앉아 과일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고...
이제야 여유를 찾았나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출발 예정 시간이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대장은 양떼 몰듯 우리에게 버스에 타란다.
양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막무가내다.
오늘 산행을 하며 유일하게 대화를 나눈 커플에게 물으니 자기네는 몇 번 이 안내산악회를 이용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이란다.
자기네도 여러 가지로 대장한테 기분이 나빴다고 하네.
대장이 별난 사람이구만.
결국 오후 2시 50분 서울을 향해서 버스가 출발했다.
일찍 출발한 덕분에 고속도로는 붐비지 않는다.
무리 지어 온 사람이 거의 없더니만 가끔 코 고는 소리만 들릴 뿐 버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고 시간 약속 잘 지키는 건 이 산악회의 장점이군.
무언가 다른 걸 기대하지 않고 교통편만 제공된다고 생각하면 요즘 말로 가성비 좋은 산악회이다.
필요할 때만 이용하면 되리라 생각하고 나도 눈을 감아 본다.